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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누크 시대(1953-1970)
 

시하누크는 캄푸치아가 "혼돈의 바다 속에 있는 평온의 섬"으로 알려진 동안 국민을 단결시켰다. 그는 10개 언어에 능통하고 5권의 저자이며, 연극 ·영화배우이자 감독으로 캄보디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중적 인사답게 자신의 정치적 위기 때마다 세인을 놀라게 만드는 극약처방을 극적으로 사용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므로 미국에서는 믿지 못할, 변덕이 심한 지도자로 인정되었다.

 1953년 3월 아버지에게 섭정을 맡기고, 자문위원회에게 국정을 넘긴 시하누크는 첫 번째 작업으로 개인적으로 외국에 나가 캄푸치아의 독립을 전세계에 호소하였다. 1954년 2월에 프랑스 연방에서 캄푸치아가 탈퇴함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였으며, 1954년 10월까지 캄푸치아 내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남군의 철수에 합의했다. 동남아시아에서 SEATO 의정서에 합의하고 미국의 원조도 자국의 중립노선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로 국한시켰다 귀국한 후 그는 다음 작업으로 캄푸치아 정국을 안정시키고 크메르루즈, 베트콩 지지세력 등으로 분산된 국내의 반체제 집단들을 정치구조 속으로 통합하여 단결시키려고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립정책을 표방하며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부터 캄푸치아의 안전에 대한 보장을 받아낸 시하누크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강해졌다. 제네바 회담에서 요구하는 총선거를 무시하고 자신의 정치 결과에 대한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총 투표자의 99.8퍼센트의 지지를 얻어냈다. 카리스마적, 전통적, 억압적, 그리고 합법적 기반 위에 근거한 그의 지도력과 캄푸치아 농민의 충성심의 결과였다. 당시의 슬로건은 “당신이 왕을 사랑한다면 횐 곳에 투표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검은 곳에 투표하시오"였다.

 

 국민의 압도적 신임을 바탕으로 그는 정당정치를 폐지하였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사로 조각을 단행했으며 의회의 무력화를 위한 헌법개정을 시도했다. 이를 계기로 고질화되어온 민주당과 왕당파간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결국 시하누크는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만약 내가 퇴위한다면 그것은 국민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구하고 내가 마련한 새 개혁안들을 성공시키기 위한 것"이라며 1955년 3월에 왕위를 아버지에게 양위함으로써 국민의 동정심을 자아냈다. 시하누크는 자신의 정치조직이며 대중주의와 파시즘의 색채가 짙은 쌍쿰(Sangkhum, 인민사회주의공동체)을 결성하여 일당정치를 구축하였다. 그는 국민들에게 애국심, (크메르인의)국가, 불의에 대한 저항(정의), 군주에 대한 충성, 그리고 불교를 강조하였다.

 

 1955년 9월 총선거에서 시하누크의 쌍쿰은 투표자 83퍼센트의 지지와 전의석을 얻었다. 10월에 쌍쿰이 구성한 정부에서 시하누크가 수상이 되었으며, 1965년까지는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는데 일당정치 하에서 쌍쿰은 여론을 대변하는 유일한 조직으로 제도화 되었다. 그후 10년 동안(1955-1965) 시하누크는 반공주의자에서 중립주의자로, 그리고 공산주의 협력자로서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하였다. 정치적 경향이 바꿔 데에는 크게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내적 요인으로는 시하누크의 일당지배에 대한 국내세력의 저항을 비롯하여 친미 성향의 크메르 쎄라이와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크메르루즈가 정글에서 군사햄동을 하며 지속적으로 시하누크 정권에 대하여 위협을 하는 것이다. 한편 국제적으로는 미국과의 관계, 라오스의 중립정책 실패, 중국과 관계를 가짐으로서 캄푸치아 정체의 안정강화문제 태국과 베트남에 대한 시하누크의 불신, 베트남 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승리 가능성 등을 들 수 있다. 대내외적으로 불확실한 상황에 처한 시하누크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베트남의 틈바구니에서 국제적으로 중립정책을 인정받으려고 양다리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캄푸치아는 미국은 물론 남베트남과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마침내 1965년에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동남아내 공산세력과 제휴하게 되었다.

 

 한편 1958년 6월 베트남공화국 군대가 베트콩을 추적하여 캄푸치아 국경을 침범하자 캄푸치아 정국과 더불어 시하누크의 중립노선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캄푸치아 공산주의자들은 시하누크 정부에 맞서 연합 전선을 결성하고 캄보디아 자유임시정부와 크메르 인민해방군의 창설을 선언하였다. 공산 베트남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후원을 받는 크메르루즈 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민족해방전선(NLF: The National Liberation Front)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 인민해방군이 왕실정부군과 비효과적인 전쟁을 전개하자 공산베트남은 보다 효과적인 전쟁을 위해 크메르 쎄라이와 크메르루즈의 연합전선을 강조하였다.

 

 1966년 시하누크는 일인 지배체제에 대한 비난과 정치적 연대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자유경쟁에 의한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는데, 총 400여명의 입후보자가 82개 의석을 놓고 경쟁한 결과 시하누크의 이중외교에 불만을 가진 우익세력이 다수석을 점유하였다. 시하누크의 공약(포ff) 취약한 공무집행 국가경제 등에 대하여 불만과 취약성은 여전히 문제로 남았으며, 집권세력내의 보수엘리트층과 반시하누크파에 의해 강한 도전을 받았다. 크메르루즈 공산세력과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도시노동자의 영향력도 역시 시하누크에게는 난제였다. 지나친 이중외교는 주변국가의 의심을 샀고 캄푸치아의 중립마저도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하누크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의 유대에 관한 심한 반발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난국타개에 실패한 시하누크는 우파정부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쌍쿰과 자신의 추종자, 그리고 특정 좌파 지도자로 구성된 지하정부를 구상하였다.

 

 선거 결과 공산세력의 준동을 염려한 우익군부 및 우익세력의 지지를 업고 경제의 비국유화, 외국투자의 장려, 서방국가들과의 교섭을 정책으로·내세운 론 놀(Lon Nol) 장군이 수상에 취임하였다. 론 놀의 우익노선은 좌파의원의 분노를 샀고,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크메르루즈는 1967년 4월 바탐방과 콤퐁참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봉기를 통해 좌파 인사들 중 일부가 극단주의자가 되었으므로 지하조직을 통제할 수 없었고, 또 론 놀 정부의 우경화를 막을 수도 없었으므로, 시하누크는 중립노선은 물론 론 놀과의 관계를 수정하려고 했다 그는 3 명의 젊은 의원, 즉 프랑스에 유학한 경제학 박사이자 공산주의자인 키우 쌈판(Khieu Samphan), 후 님(Hu Nim), 그리고 호우 유언(Hou Yuon)이 무장봉기를 선동했다고 비난하였다. 캄푸치아의 안보가 크메르루즈와 베트콩애 의해 위협받게 되자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론 놀 정부는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캄푸치아의 주권, 중립, 그리고 영토보존을 보장받고 외교관계를 개선하였으며, 미국의 권고에 따라 국제통화기금 아시아개발은행, 그리고 재건과 개발을 위한 국제은행 같은 기구에 가입하였다.

 

 론 놀 정부의 급격한 우경화가 베트남과 중국을 자극할 것을 두려워한 시하누크는 다시 중립노선을 천명하고 론 놀의 사임을 요구하였으며 국제적 지지를 유도해내기 위하여 1970년 1월에 파리, 모스크바, 북경 방문 길에 올랐다. 그 사이 론 놀은 부수상 씨릭 마떽(Sirik Matek)과 함께 캄푸치아에서 베트콩을 축출해내고 크메르루즈를 궤멸시킬 수 있는 길은 시하누크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국민사이에 증대되고 있는 반베트남 감정을 묵인한 상황하에서 비상자치권을 발동하여 시하누크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귀국을 불허하였다.

 

 1970년 3월 17일 농민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시하누크가 실권당한 이유는 그의 이중적이고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엘리트 그룹의 지지를 잃은 점, 론 놀을 중심으로 단합한 군부가 베트남인의 축출에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불만을 노출한 점, 정책결정에 대한 시하누크의 전횡적 통제와 개인적 결정에 관료들이 불만을 나타낸 점, 언론•출판의 검열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대와 취업의 기회를 잃은 대학졸업생의 깊은 좌절 등등에서 찾을 수 있다.

 

 론 놀은 캄푸치아가 "통일된 그리고 분할될 수 없는 크메르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캄푸치아의 정치적 중립과 영토보존을 위해 외국의 군사적 원조를 요구했으며, 첸 항(Chen Hang)을 대통령선거까지 임시 국가원수(시하누크는 아버지가 1960년에 사망한 후에도 왕위에 오르지 않고 국가원수로 있었다)로 지명하였다 국내적 결속을 위하여 우파나 좌파 반체제 인사들을 포용하고 정치범을 석방하였다. 크메르루즈의 쏜 옥 탄도 론 놀의 고문이 되어 정부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1,168년간 지속된 군주제가 막을 내렸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