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메일 상담 | 회원전용 >>>
정보 | 언어 | 유학 | 역사 | 지도 | 여행 | 업체 | 뮤직 | 회원전용 >>>
캄보디아역사
  캄보디아 간략사

  왕정시대
- 후난왕조

- 첸라왕조

- 앙코르왕조

- 왕조퇴조기

  근세시대
- 프랑스 점령기

- 일본 점령기

- 프랑스 재점령기

  독립시대
- 시하누크시대

- 크메르공화국시대

- 민주캄푸치아 시대

- 캄푸치아인민공화국

- 캄보디아국가 시대

프랑스 점령기(1864-1941)
 

  미얀마, 말레시아, 태국에 대한 영국의 제국주의정책은 프랑스로 하여금 인도차이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만들었다. 프랑스는 1862년 5 월에 베트남과 사이공조악을 체결하여 베트남의 남부 즉 코친차이나 지역을 점령한 후 1863년부터는 캄푸치아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육로를 통한 중국 무역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콩강의 장악이 바로 유난을 중심한 중국 남부 석권을 위한 첩경이라 믿었다. 이러한 생각에서 프랑스는 콩강에 대한 주도권을 위하여 코친차이나에 이어 캄푸치아와 라오스를 점령하려고 시도하였다. 게다가 동남아시아와 중국에서 프랑스와 영국간의 식민지 경쟁은 물론 무역 면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은 맞수였으므로 영국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캄푸치아 점령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영국은 미얀마를 점령한 상태였으므로 만일 영국이 미얀마와 먼저 조약을 체결하고 유난성에 진출한다면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큰 손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 계획의 첫 단계로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점령한 후 캄푸치아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캄푸치아가 태국의 속국이었으므로 쉽지 않았다. 조사 결과 당시 태국주재 프랑스 영사였던 카스텔로(Castelnau)는 캄푸치아와 어떠한 협약을 맺으려면 종주국인 태국과 먼저 협상을 해야 한다고 보고하고, 캄푸치아의 왕권보다 태국왕의 권한이 캄푸치아 내에 더 많이 작용하므로 절대로 캄푸치아에 대한 태국의 영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는 캄푸치아가 베트남의 속국이었던 사실을 들추어내며 태국과 함께 캄푸치아에 대한 공동종주권을 주장하였으나 태국은 이러한 프랑스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결국 프랑스는 코친차이나 총독을 드 라 그랑디에(Admiral de La Grandiere)로 경질하였으며, 총독은 두다르트 드 라그레(Doudart le laglee) 대표를 캄푸치아의 우동미차이로 파견하여 노로돔에게 4개항을 제시하게 하였다. 이 불평등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베트남의 코친차이나를 지배하는 나라로서 프랑스는 과거 베트남과 같이 캄푸치아에 대한 종주권을 갖는다. 그러므로 프랑스는 캄푸치아의 보호국이 되고자 한다.

      캄푸치아에 프랑스 관리(고문)를 상주시키며 캄푸치아는 프랑스의 허가가 있어야만 다른 나라의 영사나 관리를 상주시킬 수 있다.

      프랑스 신민은 캄푸치아에 들어와 거주할 수 있다.

      캄푸치아 내에서 프랑스의 권한을 인정하는 대가로 프랑스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캄푸치아를 보호해 줄 것이며. 캄푸치아 내의 질서와 평안 유지에 협조한다.

 이 제안은 프랑스 고문의 캄푸치아 입국 프랑스인의 치외법권, 프랑스 상품의 자유거래를 요구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외적의 침입으로 왕권의 지지(승인)를 내용으로 있다. 노로돔은 당시에 프랑스와 태국 두 나라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조약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그랑디에는 드 라그레를 캄푸치아 주재 프랑스의 고문으로 임명하고 직접 노로돔과 협상하기 위하여 캄푸치아로 왔다. 고민 끝에 노로돔은 프랑스의 도움이 없이는 태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다는 신념 하에서 조약안의 초안작성이라는 프랑스의 제의를 수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초안을 방콕으로 보내며 프랑스에게 캄푸치아가 태국의 속국이므로 프랑스는 먼저 태국과 상의할 것을 상기시켰으나 프랑스는 듣지 않고 노로돔을 위협하였다.

 파리와 사이공의 프랑스 정부에 대하여 태국은 "캄푸치아는 태국의 속국이므로 캄푸치아가 자유롭게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할 권한이 없음과 캄푸치아에 대한 모든 외교문제는 종주국인 태국을 통해야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아울러 "프랑스가 노로돔 정부와 체결한 보호령 사항은 무효임"을 항의하였다. 이러한 태국의 입장을 미국과 영국은 국제법을 인용하며 지지해 주었다. 그리고 캄푸치아가 보호령에 관한 조약에 대한 프랑스측(나폴레온 3세)의 비준을 기다리는 동안 태국은 공격의 위협을 늦추지 않고 노로돔과 협상한 끝에 노로돔은 프랑스 몰래 캄푸치아에 대한 태국의 완전한 종주권을 인정하는 내용과 바탐방과 씨엠리얍, 포티쌋, 그리고 캄퐁싸와이를 태국에게 할애한다는 내용의 조약(일명 창프억 조약)을 체결하였다. 마침내 1863년에 캄푸치아의 프랑스보호령에 대한 나폴레온 3세의 비준이 났고, 1864년에 노로돔(1864-1902)은 정 식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노로돔 정부의 행위에 불만을 품은 일부 캄푸치아인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프랑스는 태국이 사주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반란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태국에게 협상을 제의하였다. 이 협상으로 프랑스는 캄푸치아에 대한 태국의 공동종주권을 인정하였고 태국의 라마 4세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프랑스 대표와 함께 노로돔의 즉위식을 거행하여 명실상부한 왕으로 만들 것을 제의하였다. 이 제안에 라마 4세는 동의하였고, 대관식에서 프랑스의 반대로 왕관을 태국대표가 직접 씌워주지는 못하였어도 왕관을 노로돔에게 주어 노로돔이 직접 쓰도록 함으로서 1864년에 대관식이 끝났다.

 이후 프랑스는 캄푸치아 내에서 태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하여 오바레(Aubaret)를 태국 주재 프랑스 영사로 임명하고 태국이 캄푸치아와 체결한 비밀조약을 파기하기 위한 협상에 들게 했다. 태국은 영국에게 태국의 입장을 설명하고 도와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영국은 태국문제로 프랑스와 불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프랑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태국이 프랑스의 요구에 응하라고 권고하였다. 결국 태국은 프랑스의 제안에 동의하였는데, 이로써 캄푸치아를 가운데 둔 태국과 프랑스간의 갈등은 종식되었다. 대신 태국은 2-3 차례에 걸친 협상 후인 1866년에 씨엠리압과 프라따벙을 얻었다. 그후 태국은 캄푸치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으며, 캄푸치아 는 완전히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다. 마침내 1867년 7월 I5일에 태국과 프랑스는 다음과 같은 조약에 합의하였다.

         태국은 캄푸치아에 대한 프랑스 한 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한다.

      이전에 태국이 캄푸치아와 체결했던 조약은 무효다.

      태국은 캄푸치아로부터 세금이나 조공을 요구하지 않는다.

      프라따벙(바탐방)과 씨엠리압, 두 곳만 태국의 영토이다.

      태국인과 캄푸치아인은 서로 무역할 수 있다. 만일 태국인이 캄푸치아 영토 내에서 범법행위를 했을 경우 그 태국인을 캄푸치아 법정에서 처리하며, 그 반대의 경우는 태국 법정에서 처리한다.

      프랑스 선박은 콩강과 톤레쌉을 항해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에 태국 정부는 이러 한 선박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프랑스는 캄푸치아가 이 조약을 성실히 준수하도록 한다.

      이 조약을 태국어와 프랑스어로 작성하며, 그 효과는 같다.

      이 조약은 5개월 내에 방록에서 비준된다.

  1883년에 프랑스는 통킹을 점령하고 이어 다음 해에 통킹에 주도권을 획득한 후, 1884년에 노로돔에게 캄푸치아와 안남, 그리고 코친차이나 간의 관세동맹을 제의하였다. 노로돔이 이를 거절하자 프랑스는 사이공 주둔 해군을 출동시켜 프놈펜을 공격하였으며, 노로돔은 하는 수 없이 조약을 맺어 캄푸치아에 대한 통치권을 프랑스에게 완전히 할양하게 되었다. 같은 해에 캄푸치아는 라오스, 코친차이나, 안남, 킹과 함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연방에 합병되었다.

 프랑스가 캄푸치아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만든 목적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프랑스의 일차적인 목표인 베트남 내에서 자국의 이익을 영국과 기타 강대국으로부터 보호하는 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 베트남을 방어하는데 태국과 영국에 대한 완충국으로서 캄푸치아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는 캄푸치아의 질서유지와 국내적 안정을 도모하는 수준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였다. 현상유지에만 급급하였을 뿐 캄푸치아의 진정한 발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캄푸치아인의 프랑스에 대한 충성 확보와 프랑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범위내에서만 발전이 이루어졌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캄푸치아의 자치나 자립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잘 훈련시킨 베트남인을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캄푸치아를 통치했으며, 캄푸치아인에 대한 교육이나 훈련을 장려하지 않았다. 다만 식민통치 효율성과 원자재의 확보를 위해 프랑스식 정치, 경제, 사법제도를 도입하여 형법을 개선하고, 경찰제도를 근대화했으며, 캄푸치아 군대도 프랑스식으로 개편하였다. 프랑스는 전제군주제 하에서 중앙집권화된 캄푸치아 관료제를 그대로 유지시켰고, 이들에게는 정치적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민족주의 세력의 출현을 막기 위하여 군주(왕)의 지위를 상징적인 존재로 하락시켜 영속시켰다. 따라서 왕실의식과 의전은 강조되었고 전통적인 사회적인 관습도 답습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 위신과 명목상의 권위를 관료들과 공유하였다.

 캄푸치아 국민들에게 신식교육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신식교육기관도 설립하지 않았다. 초등교육은 종전과 같이 사원에서 승려들에게 전담시킨 결과 1930년대까지만 해도 지식인층과 토착 노동자 계급이 매우 취약했다. 1939년 이후 대학교육을 받은 캄푸치아인은 4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베트남인이 캄푸치아 관료직에 채용되었고, 베트남 노동자들이 상업지역에 고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프랑스는 캄푸치아의 발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캄푸치아에서 획득할 수 있는 이익에만 관심을 쏟았다. 옥수수 등 곡물과 고무 경작이 장려되었는데, 곡물은 지역소비자들의 소득증대라는 명목으로, 고무는 프랑스 산업발전에 이익을 주기 때문이었다. 도로나 병원, 프놈펜-프라따벙(바탐방)간의 철도 건설 정도의 최소한의 복지시설을 하였을 정도였다.

 노로돔의 뒤를 이은 왕위계승자는 노로돔의 아들이 아니라 1885-1886년의 반란 진압에 도움을 주는 등 프랑스에 충성을 보인 노로돔의 동생인 씨쏘왓(1902-1927)이었다. 프랑스는 자국에 충성을 보인 씨쏘왓을 왕으로 임명하여 캄푸치아에 대한 프랑스의 통제력을 과시하였다. 왕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대를 유럽까지 파병하여 프랑스 군대의 일원으로 싸울 정도로 충성을 보였다. 씨쏘왓은 아들인 씨쏘왓 모니옹(1927-1941)에게 양위하였다. 그후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발발하자 프랑스(비시정부)는 약하고 고분고분한 군주가 필요했으므로 독립심이 강한 모니옹의 아플 대신 사이공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온건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판단된 시하누크(Norodom Sihanouk)를 새 왕으로 지명하였다. 물론 일본의 입김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노로돔의 증손자이자 씨쏘왓 가문의 여성을 어머니로 둔 시하누크(1941- )였으므로 왕위에 오르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