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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쇠퇴기(1500-1864)
 

  13세기에 들어서면서 고대 크메르 제국 내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국내적으로 브라만식 궁정의식을 약화시키고 왕의 보살의식을 거부하는 상좌부불교가 스리랑카로부터 들어와 백성들 사이에 급속도로 전파됨으로서 복잡한 의식과 형식을 중시하는 힌두-브라만-대승불교 사회는 서서히 상좌부불교 국가로 되어 갔다. 크메르 제국이 약화되는 힘의 공백기를 틈타 서쪽의 짜오프라야 강 유역에서는 13세기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타이족들에 의한 소왕국들이 형성되었는데, 이중 강의 상류에서 인근 다른 타이족 국가의 지원을 받은 쑤코타이 왕국이 가장 강성했다. 몽고제국의 침입과 쑤로타이 왕국은 고대 크메르 제국의 힘을 급속히 약화시켜 현재의 지역으로 축소되었으며. 마침 동남아시아에 대한 몽고제국의 침략이 중단됨으로서 독립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고대 크메르 제국의 영화는 사라지고, 영토를 거의 모두 상실하여 현재의 영토 정도만 남아 약소한 왕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부터 앙코르왕국은 왕위계승문제로 인해 쇠퇴기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아직도 지배계층에 남아있던 힌두-대승불교개념은 또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더우기 쑤코타이 왕국을 흡수한 또 다른 타이족 왕국인 아유타야 왕국이 1359년경부터 앙코르 왕국을 침입하게 되었으며, 앙코르 왕국은 70여년의 투쟁 끝에 1431년에 패배하여 태국의 속국으로 전략하였다. 그후 왕족의 한 사람이 1434년에 톤레쌉의 남쪽 바싼에 왕국(이후 캄푸치아 왕국)을 세웠는,. 이 왕국은 이 지역 원주민의 나라였다고 한다. 한편 북쪽의 베트남은 1471년에 짬빠 왕국을 흡수하고 인구가 적은 캄푸치아의 남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태국이 미얀마와의 오랜 전쟁 끝인 1569년에 독립을 상실하고 미얀마에 의한 새로운 왕이 즉위하자 이틈을 타 1553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캄푸치아 왕국은 태국을 공격하고 많은 백성과 재산을 약탈해 갔다. 태국 아유타야 왕국의 나레쑤언 왕은 캄푸치아의 수도인 라웩을 공격하자 차야쳇싸타 1세는 라오스의 비엔티엔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사랑하였다.

  다시 태국의 속국이 된 캄푸치아는 차야쳇싸타 2세가 즉위한 1618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1628년까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 캄푸치아는 웨(후에)에 수도를 둔 베트남의 공주와 걸혼하여 태국 침공을 위한 등맹을 체결하였다 베트남은 지금의 사이공이자 수첸라의 중심지인 프라이꺼에 베트남인의 집단거주지를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1628년에 차야쳇싸타 2세가 사망한 후 판후어도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백부인 낙옹우타이가 섭정을 맡았다. 판후어토는 곧 사망하고 낙옹누가 왕위를 이었으며 1630년까지 낙옹우타이가 자문직을 맡았다. 1640년에 낙옹누가 사망하자 낙옹우타이는 자신의 아들인 낙옹논을 왕위에 즉위시켰는데. 차야쳇싸타 2세의 셋째 아들인 낙옹짠이 이에 불만을 품고 1642년에 반란을 일으켜 즉위하였다. 그러나. 1658년에 낙옹짠은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난옹우타이의 아들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낙옹우타이의 아들은 왕위에 을라 빠톰라차(1659-l67l)왕이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한층 더 많은 베트남인이 캄푸치아에 이주해 오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캄푸치아의 정치적 지위는 베트남(안남)의 가신의 지위로 하락하게 되었다.

   1671년에 조카가 삼촌인 왕에 도전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는데 이 왕이 차야쳇싸타 3세이다. 이 왕은 빠톰라차의 아들인 옹차이예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하였고, 옹차이는 즉위하기 전에 동생 옹탄에 의해 사살되었는데 옹탄은 즉위 전에 병사하였으므로 베트남은 옹우타이의 아들인 옹논을 왕위에 추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사건은 빠톰라차의 아들인 옹써가 태국의 지원을 받아 옹논과 베트남인을 캄푸치아에서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 왕이 차야쳇싸타 4세이다. 이 왕은 1695, 1699, 1702, 그리고 1704년 등 4번이나 왕위를 양도하였다가 다시 즉위하였는데, 1704년에 12세인 아들(탐모라차)에게 왕위를 양도하였으나 1710년에 옹논의 아들인 옹엠(1710-1722)에 의하여 왕위를 빼앗긴다. 탐모라차는 태국으로 피신하여 구원병을 얻어 캄푸치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722년에 태국은 캄푸치아를 공격하여 옹엠을 물리치고 옹엠의 아을(쌋따왕)을 캄푸치아의 왕에 봉하였다. 이 왕은 베트남에게 매라(마야토), 렁써(윈렁) 등을 빼앗겼으며 수도를 우동에서 라웩(로웩)으로 옮겼다. 1738년에 태국왕은 쌋따왕을 폐위시키고 탐모라차(1738-1747)를 즉위시키자 쌋따는 베트남으로 피신하였다. 탐모라차가 사망하자 아들인 옹똔이 즉위하였으나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쌋따가 라웩을 점령하였고, 옹똔은 태국에 망명하였다.

    쌋따가 사망한 후 캄푸치아는 내란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캄푸치아의 왕실은 옹똔을 추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와중에서 이때는 캄푸치아 밖에서는 베트남의 후원 하에서 쌋따를 중심으로 왕위탈환의 꿈을 가진 한 파가, 국내에서는 태국의 지원을 받은 현왕조의 판도로 굳어졌다. 쌋따가 우동을 탈환하자 베트남은 이를 기회로 삼아 캄푸치아 내에서 공식적인 베트남의 정지적 경제적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세관 무역소 집단거류지를 마련하는 등 실력을 행사하였고 많은 수의 베트남인이 캄푸치아에 정착하게 했다. 이러한 베트남의 실력행사에 대하여 캄푸치아인은 무력으로 대항하여 베트남인을 축출하고 태국에 망명하고 있던 옹똔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옹똔은 강하고 지속적인 베트남의 반발 속에서 캄푸치아의 정치와 경제적 혼란을 평정할 수 없었으므로 1749년경에는 뜨랑, 반타이맛, 바띠, 프라이끄라밧 등의 남베트남의 전 영토가 베트남(안남. Nguyen)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되었다. 1757년에는 옹똔이 스스로 빠싸르(싸득)와 멋짜룩(쪼독)을 정식으로 베트남에게 양도하기에 이르렀다. 1758년에 우타이가 옹똔을 왕위에서 축출하고 주변의 정적을 한 사람씩 숙청하고 베트남에게 쓰록뜨랑과 프라뜨라팡(뜨라윈) 2개 도시를 양도하면서 베트남으로부터 왕의 정당성을 인정받았으나 계속적인 혼란 속에 빠졌다. 18 세기말에 태국과 베트남은 캄푸치아 왕위계승에 보다 적극적으로 간여하며 캄푸치아를 영향권 하에 넣으려고 하였다. 베트남이 따이쏜(Tay-son)의 반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 태국은 캄푸치아의 어린 왕인 옹엥을 방콕으로 데려와 태국식으로 교육시켰고, 왕이 없는 캄푸치아에는 짜오프라야아파이푸벳(밴)을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옹엥이 21세로 성년이 되자 태국의 라마 1세는 그를 캄푸치아의 왕으로 즉위시켰으며(1794-1797), 밴에게 바탐방(프라따벙)과 씨엠리압을 지배하게 하고. 이 두 도시를 방콕의 지배를 받게 함으로서 실질상으로 양도한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후 1802년에 베트남이 지아롱에 의해 통일됨으로서 정지적으로 안정되자 태국은 캄푸치아의 새로운 후계자로 옹짠(1806-1834)을 승인하고 1806년에 방콕에서 왕위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옹짠은 태국에 대하여 호감을 갖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 이유로 태국의 라마 1세가 여러 신하가 있는 자리에서 옹짠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적이 있었고, 옹짠의 동생과 고모를 라마 1세가 방콕에 볼모로 잡고 놓아주지 않은 점, 밴의 사망 후에 바탐방과 씨엠리압을 캄푸치아에게 반환하지 않고 태국이 계속 지배한 점, 그리고 옹짠은 어려서부터 방콕에서 교육받고 성장 한 옹엥과 달리 캄푸치아에서 성장했으며 주변에는 친베트남 인물들이 많아 옹짠 자신도 베트남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옹짠은 라마 1세가 사망하였을 때에 직접 조문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태국이 미얀마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파병을 요구하였을 때에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태국(라마 2세)은 1812년에 옹짠을 대신하여 옹짠의 동생인 옹쌍우언을 즉위시키려 하자 옹짠은 베트남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지아롱이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옹짠을 지지하자 태국은 베트남의 위세와 옹짠의 의도를 파악하고 태국에 우호적인 옹쌍우언을 왕위에 올리려는 계획을 포기하였고, 베트남은 베트남대로 옹짠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영구히 캄푸치아에 주둔시켰다.

   이러한 베트남의 행위를 태국은 묵인하였고, 그 대가로 태국은 톤레쌉 주변의 영토를 얻어냈다. 결국 옹짠은 태국과 베트남 양 강대국 사이에서 두 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간신히 독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1833년에 태국(라마 3세)은 다시 캄푸치아에 관심을 가지고 통지하고자 하였다. 근 20년에 걸친 베트남의 캄푸치아 점령은 캄푸치아인에게 베트남인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고 더군다나 심각한 경제적 불경기는 베트남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영국은 1825-6년 미얀마를 점령함으로서 미얀마의 침공에 대한 태국의 위협을 없애주었고 베트남은 남부 삼각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베트남은 캄푸치아에 대해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태국은 옹짠을 베트남 지역까지 축출해 내는데 성공하였으나 베트남군의 반격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834년에 옹짠이 죽자 베트남은 응싼의 10세 된 딸을 즉위시키고, 이 여왕과 베트남 왕자를 혼인시키려고 했으나 캄푸치아의 반대에 부딪쳐 혼인 계획은 취소되었으며, 여왕이 캄푸치아를 직접 통치하게 하였다. 베트남은 강제로 수도의 이름을 남비앙으로 고치고 캄푸치아 관료에게 베트남식 복장을 하도록 하는 등 베트남식 법과 제도를 강요하였다. 지방행정 책임자로 그 지방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을 임명하였으며 베트남식 이름과 관습을 비롯하여 상좌부불교를 억압하는 강제정책을 적용하였다. 그리고 1840년에는 여왕과 여왕의 각료들을 당시 베트남의 수도인 후에로 데려갔다. 이러한 베트남의 정책에 대하여 캄푸치아인들은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귀족들은 태국에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시작된 태국과 베트남간의 전쟁은 근 6년간 4차에 걸쳐 캄푸치아 영토 내에서 지속되다가 1846년에 옹두엉(1846-1860)이 양국의 승인하에서 캄푸치아의 왕으로 즉위함으로서 종식되었다. 옹두엉은 장남 옹라차와디를 위시하여 3형제 모두를 태국에 보냈으며 태국에게 매년, 베트남에는 3년에 1회의 조공을 바치는데 동의하였고, 2개 이상의 지역에 대한 태국의 영구 점령을 인정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종말은 태국이 계속하여 캄푸치아를 속국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점과 베트남과 태국의 완충지역으로 캄푸치아를 다시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태국에게 유리한 결과가 되었다.

  옹두엉은 농업 독려, 식량배급, 도로확장과 보수, 그리고 세금과 부역의 축소 등 온갖 방법을 다하여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회복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두 나라가 끊임없이 거센 간섭과 통제를 가해 오자 옹두엉은 태국과 베트남이 캄푸치아를 남과 북으로 양분하여 나누려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더 강한 강대국에 의지하여 독립을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베트남과 적대관계에 있는 프랑스에 의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마침 캄푸치아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포교중이며 옹두엉의 자문역할을 해주었던 미시(Mgr. Miche)신부에 대한 호감도 영국보다 프랑스를 염두에 두게 하였다. 다시 말해, 프랑스가 영국이 동남아시아에서 미얀마와 말레이 등지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 대한 견제의 하나로 인도차이나에 군사 주둔지를 건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간파한 옹두옹은 마침내 1855년에 프랑스에게 무역조차지를 제공하는 댓가로 캄푸치아의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나폴레옹 3세에게 요구하려 하였다. 이러만 사실을 안 태국(라마 4세)은 캄푸치아가 만일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한다면 캄푸치아를 공격할 것이라는 위협과 더불어 프랑스 대표와 옹두엉 간의 협상을 방해하였으며, 한편 프랑스는 옹두엉을 만나는 문제에 대하여 태국의 승낙은 받았으나 간섭과 통제가 심하였고, 아직도 태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캄푸치아와 프랑스의 관계는 끝나게 되었다. 결국 캄푸치아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에 의존하려는 옹두엉의 정책은 무산되었고, 10년간 태국에서 거주하던 장남 옹라차와디(노로돔)에게 양위하였다. 방콕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노로돔은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1860년에 왕실 유산문제로 형제간에 심한 반목과 대립으로 인한 내란에 봉착하자 이 내란을 해결하지 못한 노로돔은 왕권의 상징인 왕관, 신성한 칼, 그리고 옥새를 가지고 방콕으로 피신하였다. 태국은 2년 후인 1862년에 그의 왕위를 회복시켜 주었으나 노로돔의 왕으로서의 자질과 통솔력에 회의를 품었으며. 노로돔의 귀국 후 얼마 안 있어 베트남이 코친차이나를 프랑스에 양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자야바르만 7세 이후 고대 크메르 제국은 강한 베트남 왕국(안남)과 태국(아유타야, 톤부리, 짝끄리)의 틈바구니에서 고전을 하면서 또는 양국의 속방으로 조공을 바치며 이중충성을 통하여 간신히 독립을 명목상으로 지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초부터 태국은 캄보디아 왕위계승자 결정에 관여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캄보디아를 사이에 두고 베트남과 태국이 대립하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양국간의 일진일퇴하는 갈등은 18-l9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더 깊어져 캄보디아에서 전쟁을 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이어 서구열강 제국주의의 입김 앞에서 캄보디아는 1864년에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변방수비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