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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왕조(802-1500)

  자야바르만 2세는 즉위 초기에는 쟈바 왕국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얼마 후에 수첸라의 6개 소왕국을 통일하였다 819(또는 802)년에 첸라왕국을 완전히 통일한 왕은 쟈바 왕국에 대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마헨 드라바드와따라(현재 프놈꿀렌산, Kulen hiils)에서 즉위식을 갖고 아직은 명실상부하게 크메르족을 완전히 통일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크메르족 국가의 왕임을 공포하였으며. 현재의 씨엠리압에서 동남쪽으로 약12-3km 가량 떨어진 곳인 하리하라라야(Lolei)에 수도를 정하였다.

 

   그 후 수첸라와 육첸라를 완전히 합병하고 타이만은 물론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세력권을 형성할 자야바르만 2세는 스스로 후난 왕국의 후계자라고 자처하고 브라만교의 교리를 정치에 적용하여 신권정치를 확립하였다. 왕권은 시바신이 브라만을 통해 왕에게 내려준 것이므로. 왕은 인간과 신의 중간매개자로서 종교적 의식을 담당함으로써 제정일치를 국법으로 정하였다. 데와라차(Deya-RaJa. God King)이자 절대군주인 왕은 820년에 브라만식에 따른 즉위식을 거행하고 의식 진행자인 브라만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브라만은 왕국의 지배계층으로 자리잡고 평민과 노예를 지배하였다 평민은 궁정의 장식과 복장을 흉내내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하였는데. 이로써 왕족과 브라만은 자신들의 정교하고 복잡하며 화려한(사치스러운) 의전과 예식을 위하여. 또 대규모 건설사업을 위하여 부를 지배할 수 있었다. 신으로서의 왕은 모든 토지(영토)와 생산물. 그리고 국민(전 백성)의 법적 소유자였고 주인이었으며. 따라서 법의 신성한 원천, 종교의 수호자.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는 방어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강화된 종교적 기반과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제정된 행정조직은 정비된 관개시설과 함께 그루 약 4세기 동안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중심축이 되었다.

   이와 같이 왕과 귀족 등 지배계층은 일반 백성과는 격리된 종교와 생활 속에서 살게 되었으며. 왕실은 매우 엄격한 벌을 만들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백성을 부리고 그 위에 군림하며, 강한 권위사회를 형성하였다. 한마디로, 크메르 사회는 왕을 맨 위의 정점으로 한 계층사회였다. 귀족들은 왕 밑의 계층으로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값비싼 장식물로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그 아래계층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 계층으로. 이들은 국가(왕)와 귀족을 위하여 매년 일정 기간씩 부역을 살았고 전쟁이 있을 때에는 병사가 되어야 했다. 이득은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거나 농사를 짓는 외에는 숙련된 공예가, 선원 등의 직업으로 국가 경제의 원동력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번법자, 전쟁포로, 그리고 빛을 갚지 못한 채무자로 구성된 노예들로 일상생활에서 거의 자유가 없으며 크메르 사회의 맨 밑 계층이었다. 왕 등의 지배계층은 엄격한 규율로 백성의 세세한 생활 부분까지 규제하였다.

   크메르인들은 자신의 문자를 창제하였고. 일주일은 7일. 1년은 달을 기준으로 하여 13달로 된 달력을 사용하였다. 자야바르만 3세(834/850-870)와 인트라바르만 1세(877-889/890)는 선왕의 뜻을 이어 계속하여 하리하라라야를 수도로 정하고 있었으며 인트라바르만 1세는 조상에게 바치는 쁘라쌋프라코(프라코 신전)를 지었다. 이외에도 왕은 제국 최초로 수도의 북부에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어 건기에 공업용수로 사용하게 땠으며 아울러 관개시설을 하여 논농사에 힘썼다.

  인트라바르만 1세의 후계자인 야쏘바르만 1세 (889/890-910/912)의 재위시에 부왕인 인트라바르만 1세는 수도를 천도하기 직전인 893년에 인트라따따까 호수에 쁘라쌋잇로러이 신전 4기를 지었으며, 동시에 조부모와 부모의 상을 만들어 세웠다. 인트라바르만 1세와 인트라테위(후난 왕국의 후예)에서 태어난 야쏘바르만 1세(또는 버롬씨와록)는 라오스 남부와 캄보디아 지역의 첸라왕국(중심지가 현재의 짬빠싹 부근의 왓푸였음) 외에 바닷가에 연해 있는 후난(프놈) 왕국도 지배하게 되었으므로 어느 왕보다도 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넓고 강한 새 왕국에서 야쏘바르만 1세는 천도를 결심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였다. 물과 고기(생선) 그리고 쌀이 풍부한 지역을 골라 수도 건설에 임하였는데. 이미 언급만 바와 같이 시바신에 대한 믿음이 두터웠던 왕은 이 새 왕도를 힌두-브라마니즘적인 믿음 위에서 건설하였다.

  왕은 새로운 수도를 정할 장소를 물색하는데 신중을 기하였다. 그 결과 톤레쌉에서 북쪽으로 적당히 떨어져 있어 우기에 범람의 위험이 없고 씨엠리압 강에 연해 있는 비옥한 충적토로 이루어진 대평야의 중심에 있어 경계적으로 문제가 없는 야쏘다라푸라(앙코르)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 지역에 있는 3개의 산중에서 제일 낮아 산 주변에 도시를 설립할 수 있는 높이 60m 가량의 프놈바켕산을 가장 신성한 산으로 정하여 산 위에 신전을 지어 숭배하고 이 산과 신전을 중심으로 왕도를 건설하였으며, 이 신전 안에 남근을 만들어 세워두고 숭배하였다. 이 왕도의 건설 양식은 후세의 왕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당시의 건축가와 공예가를 모아 돌로 지어진 피라미드식 사원의 이 신전은 산 위에 5기의 신전(동서남북의 각 방향으로 신전이 한 기씩 있고 산 정상에 중앙 신전이 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지 위에 13m에 달하는 5층 단을 쌓고 그 위에 신전을 지었는데, 이렇게 좌대 위에 신전을 짓는 형식을 후세인들은 보통 크메르식 건축양식이라고 하며.이 바켕 신전이 크메르식 건축양식의 효시가 되고 있다. 이외에도 프놈꿀렌산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강의 한 복판에 있는 사암에 남근을 조각하여 두어 강무리 그 위를 흐르도록 하였다. 이외에도 씨엠리압강의 수로를 바꾸어 수도 방위와 관개용수에 사용토록 했으며 많은 관개수로와 저수지, 그리고 해자를 파서 농업기반을 건설하였다. 홍수가 연례행사가 된 지역에 관개사업을 한 결과 매년 3-4 번씩 농사를 가능하게 했으며 여기서 축적된 부는 앙코르 시대의 위대한 건축사업, 즉 위대한 예술을 남길 수 있게 만들었다. 크메르인들은 기념탑이나 기념물의 축조에 처음에는 목조나 벽돌을 이용하였으나 9세기경부터는 돌을 사용하였다. 혹자는 이러한 크메르의 유적을 보고 형태는 크메르식이나 정신적인 면은 인도식으로, 도시와 사원, 능(陵) 등은 인도식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하기도 한다. 신권의 대행자인 왕의 거주지도 역시 신전과 같은 구조를 모방하여,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메루산(수미산)을 만들고 그 중심부에 지어 인도의 소우주 개념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신전의 상층두는 우주이며 신이 인간세상과 접촉하는 곳이라 여겼으며, 왕의 사후 이곳이 무덤이 되었다. 그리고. 왕은 시바의 상징인 남근(linga)을 돌로 만들어 세우는 것을 신성한 의무로 정하였는데 이 관습은 그후 역대 왕에 의해 계승되었다.

   야쏘바므만 1세의 사후 하르싸바르만 1세(910/912-923)와 이싸나바르만 2세(923-928)가 있었으며, 서쪽으로 바탐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자야바르만 4세(928-941)는 왕도를 일시석으로 앙코르의 북쪽에 있는 "영광의 섬"이라는 별칭이 불은 커커르(Chok Gaγgyar)로 옮겼으며, 바탐방을 위시하여 씨엠리압, 캄퐁톰, 캄퐁찬, 그리고 따케오를 지배하였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944-968)는 한동안 버려졌던 앙코르를 다시 새 수도로 천도하였으며 베트남, 라오스, 태국, 미얀마, 그리고 중국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석권하게 되었다.

   자야바르만 5세(968-1000/1001)때는 학문의 황금기로, 따케오에 기념비를 세웠고. 여동생이 인도의 마두라에서 온 브라만 디와카라바따와 결혼함으로서 인도문화가 더 많이 유입되었나 왕의 사후 왕국은 한동안 욍위 쟁탈을 둘러싼 내란에 휩쓸렸다. 몇 년간 지속된 내란 끝에 왕위에 오른 쑤리야바르만 1세(1002-1050)는 1011년부터 신하들로 하여금 매년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하도록 함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단단히 하였다. 이 의식에서 외어야 하는 내용을 왕궁의 문에 새겨 두었다. 왕은 후에 상좌부불교를 나컨씨탐마랏으로부터 들여와 백성들에게 전파시켰으나 다시 브라만교에 귀의하여 수도의 동서남북 네 곳에 남근을 모신 신전을 만들어 신왕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했으며, 농업용 대저수지를 도시의 서쪽에 건설하기도 하였다. 싸오프라야 강가의 롭부리까지 왕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쳐 지금도 그 기념비가 태국의 롭부리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우다요디트야바르만 2세(1050-l066)는 역대의 선왕과 마찬가지로 영토를 넓히는데 성공하였고, 국력을 과시하는 힌두 사원을 건설하였다. 황금도색을 한 철탑이 있는 피라미드 형식의 바푸온 사원을 건설하였으며, 브라만과의 결속을 단단히 함으로서 신왕으로서의 위상을 확실히 하였다.

   고대 크메르 제국, 또는 앙코르 제국은 12세기에 들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절정기에 달하였다. 특히 쑤리야바르만 2세(1113-1150)는 인근의 짬빠, 안남은 물론 현재 미얀마의 예야와디 강까지 석권하여 제국 최대의 영토를 지배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제국의 인구는 100만 명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에 남는 위대한 석조물, 즉 아직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종교건축물인 앙코르왓(사원)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왕의 무덤인 동시에 비스누신의 신전이기도 하다. 왕은 자신을 비스누신과 동일시하였다. 이때는 시바신보다 비스누신을 더 숭배하였다고 한다. 홍토와 사암으로 지어진 이 신전은 850m x 1.000m의 직사각형 회랑 형태의 호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회랑은 안쪽 벽에는 라마야나를 비롯하여 힌두신들의 이야기가 양각되어 있다. 이 신전은 서쪽을 향하여 건축되어 있으며, 바깥벽 안쪽에서 육교로 넓이 190m의 해자를 건너면 3기의 탑과 함께 기다란 익랑(翼廊)이 있고, 여기서부터 돌을 깔아 만든 약 450m에 달하는 길과 넓은 참배도가 중앙신전을 향하여 건축되어 참배객을 인도하는 길 역할을 하고 있다. 사원의 주요 건축물은 웅대한 방추형 중앙 사당탑과 탑의 동서남북 4방향에 십자형으로 벋어있는 익랑, 그것을 둘러싼 3중의 회랑과 회랑의 4모서리에 솟아있는 거대한 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성은 입체적이고 중앙의 사당탑이 약간 높다. 회랑의 높이는 제1회랑(215 × 187m)이 4m, 제2회랑(115 × 100m)이 12m, 그리고 제3회랑(60m2)이 25m이다. 세계의 중심이며 신들의 자리인 메루산(수미간)을 돌을 사용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높이 55-60m의 중앙사당탑의 끝에서 3중으로 둘러싼 회랑의 4 모서리의 탑 끝을 이어보면 사각추 피라미드가 된다.

  이 사원의 건축양식은 인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건물의 형태와 석조장식 등 모든 면에서 앙코르 왕국의 독창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총길이 760m에 이르는 제1회랑 내벽의 부조, 제2회랑 안의 돌로 조형된 아름다운 샘물, 제3회랑 내부의 화려한 십자형 주랑과 탑 등은 뛰어난 구조물이다. 조형에서는 하늘의 무희인 압쌀라, 여러 개의 머리를 부채처럼 펴서 치켜든 큰뱀(naga-serpant), 창문이나 지붕의 장식조각 등이 이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서쪽에 있는 회랑의 내벽에는 나라이(비스누)신의 현신을 찬양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따의 완벽한 벽화가 아릅답다. 서쪽 회랑의 동남쪽 내벽에는 쑤리야바르만 2세의 전쟁상과 당시의 군대들을 비롯하여 왕의 위업을 그려 놓았다. 쑤리야라르만 2세치 사후 욍국은 또다시 왕위를 둘러싼 내란 외에 전쟁과 사원 건축을 위한 과다만 부과에 대항하는 농민들의 반란, 중요한 관개체계에 대한 후임 지배자의 소홀, 말라리아 페스트 등의 질병의 계속적인 창궐, 몽고족의 동남아시아 침략에 따른 충격, 그리고 짬빠 왕국의 발전과 새로운 강한 국가의 발흥 등의 문제로 국력이 약해졌다. 그 결과 4년간 짬빠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12세기말 자야바르만 7세(1181-1218)는 짬빠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고대 크메르 제국 최대의 영토를 석권하였다. 왕은 부왕을 따라 대승불교를 신봉하였으며, 1200년경에 수도를 앙코르왓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앙코르톰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다. 왕은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쉽게 방어할 수 있도록 수도를 작게 계획했다. 성벽은 모두 홍토석을 사용하였으며, 한 면이 3km 정도의 정사각형의 이 도시의 한복판에 정사각형의 신선을 건립하였는데, 그 중심에 세계의 중심인 바이온묘(廟)가 높이 솟아있고, 그 동서남북으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동서대로와 남북대로를 만들어 도시를 4등분하였다. 도시를 4등분하는 2개의 죽이 성벽과 만나는 곳에 왕도의 문이 4개, 왕궁에서 동쪽으로 벋은 대로 위에 1개 등 모두 5개의 문이 있다. 이 5개 문의 앞면에는 큰 뱀을 껴안은 일련의 석조 거인상을 난간으로 한 육교가 있으며, 문 자체는 거대한 4면의 얼굴을 한 51기의 탑문으로 되어 있다. 앙코르톰의 핵심인 아름다운 거대한 건축물은 바로 4면상이 있는 바이온묘로, 길이 175-240cm의 이 얼굴은 인간의 모습을 빌린 대승불교의 아와로끼떼쓰바라 보살이나 신의 얼굴로 불교도였던 왕은 그 얼굴들을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성벽에는 크메르와 짬빠와의 전쟁사를 비롯하여 주민의 사는 모습, 다시 말해 시장, 닭싸움, 운동하는 모습 등이 양각되어 있다.

  잇달은 대규모의 건축공사는 크메르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으며, 크메르의 백성들은 강제노역으로 생활고에 허덕이게 되었다. 아울러 브라만교라 대승불교의 복잡하고 어려운 종교에 염증을 내었으며, 마침 부처 재세시의 간난하고 편한 의식과 교리를 들고 전파되어온 상좌부불교에 점차적으로 심취되었다. 결국 크메르 제국을 지탱해 온 브라마니즘과 대승불교는 그 밑뿌리부터 흔들렸고 따라서 크메르 국왕의 권위도 점진적으로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이웃의 짬빠 왕국과 라오스, 태국이 강해졌으며, 이들과의 전생으로 인구가 감소되어 노동력이 줄어들었고, 국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태국은 1431년에까지 앙코르톰을 공격하여 점령하자 1434년에 수도를 프놈펜으로 이전하였다. 그후 크메르의 많은 유적들과 기념비들은 폐허로 변해버렸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