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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라왕조(550-802)
 

   현재 캄보디아인(크메르족)의 조상 격인 컴(Khom)족의 왕국인 쳄라 왕국(Chenla)이 후난 왕국의 북쪽에서, 현재 남부 라오스와 북부 캄보디아 지역에서 일어났다. 중국인들이 이치앙나뽀러(싼스크리트어로 이싼푸라)라고 불렀던 이 왕국은 후난 왕국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훈 왕국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독립한 후 627년에 후난 왕국을 흡수 하였고. 인도로부터 문화를 직접 도입하여 매우 선진적인 인도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파바바르만(540-600)왕대에 이미 동쪽으로는 참빠(Champa)왕국, 서쪽으로는 벵골만, 남쪽으로는 말레이 제국과 국경을 접할 정도로 방대한 영토를 장악하였다. 이싸나바르만(611-631)왕은 중국의 당나라로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왕래가 잦았다. 왕의 이름 뒤에 "바르만(Varman)"을 붙였는데, 이 단어는 싼스크리트어로 "피보호자” 또는 "부하"라는 뜻으로 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에 대하여 사용하던 단어였다.

   첸라 왕국은 그 건립 초기부터 후난 왕국의 왕실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 후난 왕국을 흡수한 첸라 왕국의 파바바르만왕은 카운디냐의 후손인 후난 왕국의 공주의 후손이었으며, 그 또한 후난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였고, 왕에 대한 호칭도 후난 왕국을 따라 "바르만"이라는 어휘를 붙였다. 이처럼 후난 왕국과의 밀접한 관계는 첸라 왕국의 초기에는 많았고 행정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후난 왕국의 제도를 답습하였다고 할 정도였다 파바바르만의 조카인 이싸나바르만 왕은 수도를 톤레쌉의 북쪽에 이 싸나푸라에 건설하고 참파 왕국과 사돈관계를 맺었으며, 635년에는 그 손자가 참파 왕국을 지배하기도 할 정도로 강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8세기경에 쟈바의 싸일랜트라 왕국이 강해져 해상무역을 장악하게 되자 한때 싸일랜트라 왕국에 예속되기도 하였으나 790년경에 수첸라는 독립하고 씨위차야 왕국에 도전할 정도의 강대국이 되었다.

  당시 첸라 왕국의 모습에 대하여 중국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수도인 이싼푸라에는 2만가구가 있는 큰 도시이며, 왕국은 30개 이상의 도시국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도시국가는 약 1,000가구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비단 옷을 입은 왕은 3일에 한번씩 보석과 가죽, 또는 상아로 장식한 장미목 단상에 앉아 정사를 보며, 관리들은 귀걸이를 하고 비단 옷을 입는다. 왕의 자문을 하는 고급관리는 5명 정도이며, 하급관리의 수는 많다. 왕의 명령이 있어야 알현할 수 있으며, 알현을 끝낸 후 신하는 무릎걸음으로 뒷걸음쳐서 물러난다. 큰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며, 왕 즉위일에 다른 형제들은 자신의 귀, 손가락 코를 잘라 반란하지 않을 것을 새로운 왕에게 맹세하며, 왕은 이 형제들에게 왕궁을 하사하는 등 편히 살도록 보살핀다. 일반 백성의 몸집은 작고 피부가 검은데,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피부가 희다. 남녀 모두 머리를 기르고 귀걸이를 하며 놀기 좋아한다. 오른 손은 깨끗하고 왼 손은 더럽다고 믿으며 작은 나무 가지를 사용해 이를 닦고 아침마다 목욕한다. 매일 공부하고 기도하며 집밖에 나갈 때는 무기를 지닌다. 결혼할 때 신랑이 신부에게 예물을 주며, 신부가 결혼날짜를 정한다. 결혼식 날 친척과 웃어른들은 신랑을 데리고 신부집으로 간다. 결혼 전에 어머니를 여윈 아들은 유산을 상속 받으나 이미 결혼한 아들은 상속할 수 없고, 어머니의 재산은 공공재산이 된다. 부모가 사망하면 아들은 삭발하고 금식하며 곡을 한다. 딸은 앞머리를 둥글게 자른다. 친척들은 승려를 모셔 설법을 듣고 불경을 외우며 시신을 모시고 행렬한다 시신은 쌓아 올린 나무단위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금이나 은으로 만든 합에 담아 바다나 강에 띄워 보낸다. 가난한 사람의 시신은 옹관에 담아 색칠을 하며 화장하거나 풍장을 한다. 건축양식은 후난 왕국의 영향을 받아 사암을 이용한 신전 등의 건축물을 지었다. 왕궁과 집은 주로 동향으로 지었으며 일반 백성이 사는 집의 지붕은 풀로 이었으며 왕궁의 지붕은 기와로 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조각품의 얼굴은 크메르인과 유사하다고 한다. 브라만교를 신봉하였고 특히 시바와 비스누(나라이)를 주신으로 섬겼으나 왕국이 양분된 이후부터는 시바에 대한 숭배가 약화되었고, 따라서 인도의 영향도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해협부근에서는 굽타 외에 팔라바의 영향이 무역의 약화와 더불어 급격히 약해졌다. 죄를 가리는 법도 후난 왕국과 유사하였다. 끓는 기름에 손을 넣어 보게 하여 데지 않으면 무죄였고, 왕좌에 3-4일간 앉아 있게 하여 몸에 진물이 나고 부르트면 죄가 있다고 판정하였다. 형벌의 종류도 산 매장, 손가락이나 발가락 절단, 코 떼어내기 등등 다양하고 무거웠으며, 도둑을 잡았을 경우 잡은 사람은 도둑을 가두거나 때릴 수 있었다. 기록은 사슴가죽이나 기타 동물의 가죽에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했으며, 인도의 대서사시인 라마야나, 마하파라따 등을 즐겨 읽었다.

  첸라 왕국은 자야바르만 1세의 사후, 즉 706년 이후 양분되었는데 남쪽은 수(水)첸라(첸라 본토), 북쪽은 육(陸)첸라(콩강의 삼각주를 포함한 과거의 후난 지역)이다. 육첸라는 717년에 중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수첸라 보다는 강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첸라는 다시 2-6개 정도로 분열되었던 것 같으며 8세기경(774-787)에 쟈바의 싸일렌드라 왕국의 침입을 받았다. 마지막 왕인 자야바르만 2세(770-834/802-850)는 무력으로 수첸라를 재통일하여 크메르 제국을 건설했고, 앙코르왓이 세워진 톤례쌉 호수의 북쪽에 수도를 새로 건설하였다 . 첸라 왕국 때부터 깔부쟈, 또는 캄푸치아라는 이름이 이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연원은 첸라 시조에서 찾을 수 있다. 설화에 따르면 첸라의 시조는 깜부싸와얌푸와라는 이름의 도사(신선)와 암빠썬메라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후에 첸라 왕국의 부마가 되었다. 후난 왕국이 왕위 계승문제로 약해진 틈을 타 후난 왕국을 무력으로 흡수하여 합병하였다. 그러므로 깜부의 아들, 다시 말해 신선(천사)의 아들의 후손이라는 의미의 인도 단어에서 캄푸치아라는 단어가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