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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난왕조
 

  학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캄보디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1-6세기, 또는 3-7 세기에 메콩 델타 지역에 기반을 두고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후난(Funan, 扶南)왕국에 이르게 된다. 후난 왕국의 역사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있는 자료도 대부분이 3세기경에 이 지역을 여행한 중국인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초의 캄보디아 제국이자 동남아 초유의 힌두 제국이었던 후난 왕국은, 중국인들에 의하면, 카운디냐(Kaundinya)라는 이름의 인도 브라만에 의해 A.D. 1 세기경에 세워졌다고 한다. 후난이라는 국호는 싼스크리트어로 "산의 왕", 또는 "산의 지배자"라는 뜻의 고대 크메르어 단어인 "프남"(현대 캄보디아어로 "끄룽 프놈"의 프놈)을 중국인이 중국어로 음역하여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이때의 산은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한 신들이 사는 메루산(Mount Meru, 수미산)을 의미한다.

  전설에 의하면 인도에 사는 카운디냐라는 이름의 브라만 젊은이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한 신이 나타나 활을 가지고 배를 타고 동쪽으로 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꿈을 이상하게 생각한 그 젊은이가 다음 날 아침에 꿈속의 신상이 있는 사원에 가보았더니 활과 화살통이 놓여 있었으므로 용기를 내어 그 활과 화살통을 들고 상선을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오랜 항해 끝에 한 해변에 닿았고, 마침 그곳에서 리우예(Willowleaf, 버들잎, 柳葉?)이라는 이름의 처녀를 만난 활로 위용을 자랑하여 그 처녀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마침내 그 젊은이는 버들잎과 결혼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그 나라가 바로 후난 왕국이며, 브라만 젊은이는 인도의 문화와 제도를 나라의 기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르면 그 처녀는 용 또는 뱀(Naga)의 여신, 또는 물 속과 땅 위에서 생존할 수 있는 큰 뱀(용)의 딸로 인간에게 복과 벌을 줄 수 있으며, 자연을 수호하는 신이라고 하여 숭배되었다고 한다.

   캄보디아인은 후난 왕국의 시조를 인도 설화 및 인도문화와 연결시켰으며, 이 전설은 그후 1,000년 이상 궁중의식의 중요부분이 되었다. 3세기 중엽에 콩 강 하류 지역에 파견되었던 중국인 사신의 기록에 의하면 후난 왕국의 환시만(Fan Shih-man, ?-225)왕이 전쟁터에서 사망하자 조카인 환찬(Fan Chan, 225-245)이 즉위하여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왕위의 정통성을 각각 240년과 243년에 인정 받았다. 이 기록은 후난 왕국이 중국과 인도와 교류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며, 그 다음 왕인 환순(Fan Shun)왕 때에는 인도와 중국의 사신이 후난에서 서로 만나 선물을 교환했다(250)고 하고, 추찬딴(Chu Chant'an)왕 때인 357년 이후부터는 인도와의 관계가 한층 더 밀접해졌다고 한다. 후난 왕국의 첫 수도는 '야타푸라(city of the hunters)'였으며, 주요 항구는 타이만 쪽 매콩강(이하 콩강) 포구에 있는 옥 에오(Oc Eo)로 타이만을 가로질러 안남해를 항해하는 무역을 관장하였다고 한다. 건립이래 후난 왕국은 약 400-500년 동안 주변국을 영향권 하에 두고 조세와 조공을 받으며 거대한 왕국을 이루었다.

   후난 왕국은 현재의 캄보디아는 물론 남베트남, 태국의 짜오프라야 하류지역, 남부 라오스, 그리고 남쪽으로는 빳따니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석권하였다. 비옥한 콩강 삼각주의 장악은 왕국을 농경국가로 성장시켰고, 콩강의 크고 작은 지류는 수상교통의 중심이 되었으므로 중국인 여행자들은 콩강을 이용한 후난왕국 횡단 항해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후난 왕국의 발전과 번영은 농업과 무역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왕은 매년 일어나는 홍수에 대비하여 치수에 힘써 관개시설을 정비하고 3모작을 장려하였다.

  3세기경부터 후난 왕국은 중국과 접촉하였다 225년에 후난의 한왕은 중국에 사신을 보냈으며 중국도 245-250년 사이에 후난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때 중국인 사신들은 후난에서 인도왕국의 사신과 만나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는 등 후난 왕국은 인도와 중국간의 교량 역할, 다시 말해 남부동남아와 중국, 그리고 벵골만을 잇는 무역항로를 지배하였다.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중국의 보호와 인정을 받으며 문화적으로는 인도의 영향하에서 후난 왕국은 전성기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브라만의 문화를 받아 들였으므로 왕은 반신(半神)적인 존재였으며, 또한 산왕(山王)이었다. 후난 왕국의 왕과 귀족, 평민의 모습과 생활을 묘사한 중국의 깡 따이의 기록(3 세기경)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수도는 계단식 지붕이 있는 우아한 궁전이 있는 성으로, 왕궁에는 누각이 있으며 왕은 그곳에서 산보한다. 왕궁은 벽돌로 지었는데 겉에는 횐 회칠을 하였다. 왕은 아침마다 3-4 회에 걸쳐 알현을 받았다. 왕과 귀족들은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어 어디를 가더라도 코끼리 위에 앉아 일산을 받으며 종자를 거느렸다 일반 백성들은 아래만 가린 채 벌거벗고 다녔으며 피부색은 검고 머리카락이 곱슬곱슬 해서 모습이 추하다. 강가에 일렬로 죽 붙여 지은 대나무 집에서 살았으며 닭싸움과 소싸움을 즐기고 도둑질을 용서하지 않았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고 사탕수수와 면화도 재배하였다. 그들의 예절은 간단했으며 세공목각을 장식물로 갖고 다녔고 은을 입힌 도구를 사용했으며 금, 은, 진주, 그리고 향료 등을 세금으로 바쳤다. 이외에도 잘잘못을 가리는 재판방식이 특별했다 예를 들어 끓는 물속에 반지나 계란을 넣고 건지게 하여 손이 데이지 않거나, 뜨겁게 달군 쇠사슬을 맨손으로 들고 일곱 발자국을 옮겨 데지 않으면, 또는 물 속에 오랫동안 잠수하여 죽지 않으면 결백하다고 믿었다.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는 방법은 화장, 매장, 수장, 풍장이 있었으며, 그 유가족은 삭발과 면도를 했다고 한다.

   시바(Shiva)신을 숭배하는 힌두교(브라만교)가 공식 종교로 국가를 통제하는 매커니즘이었 으나 불교도 들어와 일반 피지배계층 속에 이미 상당히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다. 후난 왕국의 성립 이전부터 이곳에 살던 선주민은 정령과 귀신 숭배를 신봉하고 있었는데, 힌두교에 의해 압도당하고 브라만들은 궁정의식과 의전을 담당하였다. 브라만에 의해 남인도의 팔라바 문화 및 관습이 전래되었다. 물론 인도의 궁정어이자 당시 불교어였던 싼스크리트어가 궁정언어가 되었고, 현대의 캄보디아 문자로 발전한 북인도의 팔라바 문자가 이 지역의 언어를 표기하게 되었다. 약 5세기 초반에 인도문화의 2차 유입이 있었으며, 이 왕조의 자야바르만(Jayavarman, 꼰틴야바르만) 1세(470-514)는 가장 위대한 왕으로 손꼽히고 있다. 왕은 중국의 광동성까지 상인을 보내 무역을 하였으며 항해술에 능해 무역과 해적을 겸했다고 한다.

  후난 왕국은 토착 네그리토(Negrito)와 혼혈인 말레이 인종 또는 인도네시아인이었고 언어는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n)어를 사용하였는데 건국 초기부터 벵골만 주변과 말레이 반도를 가로질러 타이만으로 운항하던 인도 상인과 포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인도의 굽타 건축양식을 본받아 힌두교 사원과 궁전을 지었으며, 금, 은, 청동, 상아, 산호 등의 세공품으로 장식하였다. 정치적으로 왕은 시바의 현신으로, 궁전은 우주의 중심인 신전으로 간주하였으며, 왕의 권력은 수도 중앙의 "신성한 산"에 안치되어 있는 남근의 형태로 구현되어 숭배되었다. 시바를 비스누의 우위에 두고 신봉하였다. 후난 왕국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위계적 질서구조 속에서 왕-신의 정치구조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농경사회를 주도했으며, 백성들은 콩강 델타의 쌀과 풍부한 물고기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다.

  후난 왕국은 6세기 중엽에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하여 국력이 약해져 마침내 종속국의 하나이자 차남의 왕국인 첸라(Chenla) 왕국에게 무력으로 합병되고 말았다. 후난 왕국은 비문이나 기념비 등 유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왕의 신권 사상과 싹디나 제도 등을 비롯한 무형의 유산을 남겨 후난 왕국 이후의 여러 왕국에 전승되었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