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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프치아인민공화국 시대(행삼린 정권 1979-1989)
 

  베트남은 헹 쌈린을 도와 캄푸치아의 행정업무를 떠맡았다 프랑스 식민지 정책으로, 또 수많은 학살로 캄푸치아 내에는 잘 훈련되고 교육받은 행정담당자가 극소수 있었을 뿐이어서 행정의 공백이 생겼고, 이 관직의 대부분이 국내 거주 베트남인에게 돌아갔다 당시는 전국적으로 45명의 의사가 있었을 뿐이며 캄푸치아인은 화폐, 시장, 은행, 금융제도, 산업 시설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들은 국민을 혼란에 빠뜨렸고, 아울러 베트남에 대한 전통적인 불신감을 부추겼으며, 태국 국경의 서부 정글로 도주한 3만 폴 폿트 군대의 저항을 야기시켰다. 중국은 적의를 나타냈고 ASEAN 국가들도 헹 쌈린 정권을 승인하지 않겠다며, 헹 쌈린의 정부는 바로 베트남의 괴뢰정부이며 소련의 하수인이라고 비난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세계여론의 악화. ASEAN 국가의 승인 거부. 중국의 노골적인 적대감으로 헹 쌈린 정권은 화폐경제와 8시간 임금노동제를 도입하고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헌법의 성문화와 의회선거를 약속했다. 베트남 모델에 기초를 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정책를 실시하였으며, 사회의 질서와 안전 보장을 위하여 자치위원회를 구성하고, 확실한 국민의 지지 하에서도 농업생산성의 신장을 위해 15가족을 한 단위로 하는 농업생산연대조직, 크롬싸막키(Krom Samaki: Salidarity Groups)를 구성했다. 지지기반이 약한 그는 폴 폿트 정권과는 달리 사회주의 근간을 유지하며 부분적 개혁 •개방을 펼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베트남은 군대를 20만명 수준으로 증강•·배치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을 분쇄하려는 것이었다. 폴 폿트는 KCP의장 겸 군사령관직을 유지했으며 카르다몬 산에서 은신하고 있는 키우 쌈판은 캄푸치아 대민족 통일애국 민주전선을 이미 1979년 12월에 결성하고 대항하였으므로 베트남은 10만의 병력을 남부 캄푸치아에 배치하였다. 둘째, 폴 폿트 정권의 전복에 대한 중국의 보복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키우 쌈판은 1980년 3월에 북경으로 가서 중국의 지지와 물질적 약속을 받아냈다. 셋째, 쏜 싼(Son Sann)을 지도자로 한 대부분의 반공주의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세력이 태국의 국경지대나 태국에 피신하여 있었으므로 태국과의 국경분쟁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태국은 크메르루즈를 지원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속적인 내전으로 캄푸치아는 대량학살 이외에도 경제의 피폐와 기근이 만연하였으므로 신 정부는 베트남의 지지 아래 식량절약정책을 시도하고 의도적으로 수많은 난민을 방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에는 악천후로 흉년이 들었는데 베트남은 이 기근을 이용하여 퇴각하는 크메르루즈에 대항하는 주무기로, 또 일반대중의 협력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식량 안 주기"작전을 실시했다 그 결과 캄푸치아인 사이에서는 "론 놀은 우리(캄푸치아 국민)를 폭격했고, 폴 폿트는 우리를 죽였으며, 베트남은 우리를 굻겨 죽이고 있다"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기근으로 난민이 대규모로 이동하였으므로 1979년 5-6월 파종 등 거의 모든 농사활동이 중단되었고, 이외에 세계의 구호곡이 도착하기도 전에 많은 사람이 아사했다. 국경에서 이루어졌던 유니세프와 세계교회 평의회의 합동구제가 1980년 12월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 초 유엔 및 아세안 국가들은 유럽공동체와 함께 캄푸치아 내에서 외국군대의 철수, 비무장지역화, 그리고 유엔감독 하에서 자유총선을 제의했으나 국내 간섭이라는 이유로 역시 거부당했다. 미얀마를 포함하여 동남아시아 비공산국가들은 1981년 2월 뉴델리에서 열진 비동맹회의의 92개국 연합에서 헹 쌈린 정부가 의석을 갖지 못하도록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만장일치로 캄푸치아에서 외국군대철수요구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해 미국과 중국은 베트남의 캄푸치아 점령을 반대하는데 공동보조를 취한다고 선언하였다.

 

  1981년 초 헹 쌈린은 국내정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지방선거, 국회의원선거, 정당구조의 새로운 조직 등에 착수하여 117명으로 구성된 국회를 구성하고 새 헌법을 채택하였다. 캄푸치아인민혁명당(KPRP: Kampuche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이 KCP를 대신했으며, 친베트남 경향의 펜 쏘완(Pen Sovan)이 당서기장에 임명되었다. 국가최고기구로는 7인의 국가평의회를 두었으며 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헹 쌈린이 주도하여 그해 12월에 헹쌈린은 대통령과 당서기장을 겸직하고 부분적으로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묵인한 결과 정치적 경제적 고립에도 불구하고 시장경제와 화폐경제가 기적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경제 회복의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조의 대부분이 베트남군에 의해 징발되었지만 사망률과 영양실조의 정도를 줄이는데

          국제적인 식량과 의약품의 구제활동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방식의 유지를 표명했지만 헹 쌈린이 중앙계획경제 실시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근면한 캄푸치아 농부들 좋은 기후 조건 그리고 비옥한 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축출된 크메르 루즈의 KCP의 키우 쌈판은 쏜 싼의 인민민족해방전선 및 시하누크의 모우리나카(Moulinaka)등과 제휴하여 민주캄푸치아 연립정부를 구상하고 쏜 싼에게 수상직을, 그리고 시하누크에게는 대통령직을 제안하였다. 이 3인은 1982년 6월 중국의 중개로 쿠알라룸푸르에서 3자 회담을 갖고 민주캄푸치아연립정부(CGDK: Coalition Government of Democratic Kampuchea)의 결성을 선언하고 시하누크가 대통령직을 키우 쌈판이 부통령과 외무상직을, 그리고 쏜 싼은 수상직을 맡았다. 이 선언은 만일 3자 회담이 난국에 이른다면 CGDK는 크메르루즈로 되돌아간다는 크메르루즈에 대한 취지의 면책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ASEAN 국가들은 대부분 CGDK에 정치적 지지와 인도주의적 지원을 약속했으며 중국은 유일하게 무기공급을 포함하여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유엔도 CCDK의 대표성과 유엔의석을 인정했다.

 

 그러나. 시하누크의 아세안 국가 심방 결과 유엔에서 캄푸치아 의석을 연립정부가 보유한다는 국제적 지지 외에는 외부로부터 실질적인 지원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미국으로부터도 피난민에 대한 인도주의적 도움 외에는 불가능했다. 유엔은 1986년까지 매 년 이 연립정부를 승인하였다.

 

 1986년까지 캄푸치아는 헹 쌈린이 최고지위를 차지했고 수상직과 외무상직은 PRK내 주요 인물이자 이데올로기주의자라기보다는 실용주의자인 쌈타 훈센이 맡았다. 훈센의 PRK는 베트남 군대와 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도시와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캄푸치아인의 삶을 통제하는데도 불구하고 극히 소수의 국가만 PRK를 승인하였다.

 

 베트남은 캄푸치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SEAN 국가들을 방문하고, 유엔보다는 지역쳐의를 통해 해결하자는 안을 비롯해 캄푸치아 주둔 베트남 군대의 부분적인 철수, 난민의 안전지대설치, 태국 국경에서 베트남군의 20 마일 후퇴 등 새로운 기준에 의한 대화를 제의했으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1983년 3월의 제7차 뉴델리 비동맹국 정상회답에서는 CGDK를 승인하자는 온건파와 헹 쌈린을 지지하자는 급진파로 나뉘어 대표성 문제에 대한 격론만 벌였다 참가국 정상들은 대화를 통하여 캄푸치아 문제를 해결한다는 기본적 입장만을 확인하였다.

 

  집권 초기에는 베트남모델을 기초로 사회주의경제정책을 실시했으나 1980년대 중반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를 모델로 제도화했다. 1986년 5차 당대회에서 훈센의 PRK는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6-1990)을 채택하였는데,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베트남의 도이 모이 정책의 성공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계획은 비교우위 분야인 식량, 고무, 목재, 수산업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였다. 이를 위한 실행목표로 연 7퍼센트의 식량생산 증가, 연 5만톤의 생고무 생산, 20만m2의 목재생산, 13만톤의 어획량 공업발전을 위한 중소규모의 기업건설, 1990년까지 3억Kw의 전력생산을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끝난 1990년의 쌀 생산량은 2억 2천만톤, 생고무 3만 6천톤, 어획량 8만 2천톤에 불과했고 목재 생산량만 목표량 20만m2를 달성했다.

 

  PRK는 외국인 투자 자유화 개인산업 허용 국제무역 증대, 토지소유 인정, 민간운송업 허가, 기업의 국유화 방지 천명, 사기업의 법적 보장 등등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정부 시책, 경제활동 인구의 증가, 기후조건의 호조로 경제 상황이 호전되어 쌀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산업, 농업, 민간영역에서 생산량이 증가되었다.

 

 1979-1980년 베트남모델의 크롬싸막키 체제가 농업경제를 주도하면서 다량의 농업생산과 소농들의 경작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1984년에는 약 10만 2천개의 크롬싸막키가 조직되었다. 각 조직은 보통 10-15가구의 농가로 구성되었으나 산악지대 같은 인구 희소 지역은 5-7 가구의 농가로, 인구밀집지역은 60-70 가구로 조직되었으며, 각각 10-l5hr의 농지가 할당되었다. 이외에도 마을 전체나 공동체 소유의 별도 토지가 있었는데, 이것은 크롬싸막키에 대여될 수 있었다. 각 농가는 800-2,000m2의 개인경작지를 할당받아서 경작하고 생산물은 자유로 매매할 수 있었다. 크롬싸막키는 부족한 영농장비를 가족단위로 대여해 주고 농촌경제의 회복을 적극 추진했는데, 이 제도를 통해 대단위의 농업생산품의 확장보다는 집산적이고 근대화된 새로운 형태의 농업정책이 추진되었다. 농사에 필요한 우마차와 농기구를 공동 이용하고 크롬싸막키는 이를 국가로부터 구입하여 대여하였으며 집단적인 노동을 통해 얻어지는 생산품 및 이익은 국가나 지역단체에 일부 지불하고 나머지는 노동능력에 따라 가족단위로 배분하였으나 아직은 세계 최빈국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고, 베트남과 소련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1979년에 발표된 바에 의하면 크롬싸막키에서 생산된 경작물은 다음의 원칙에 따라 분배되었다.

         수확물에 대한 세금은 없으며, 일정량을 의무적으로 국가에 판매 할 의무도 없다

      각 크롬싸막키는 다음해 경작을 위해 충분한 양의 종자를 비축해둔다.

      전쟁 상이용사, 국가공무원, 지역방위군, 교사, 의료종사원 등을 위하여 일정량을 할당해야 한다.

      나머지 수확물은 작업 시간에 의해 분배되는데, 힘든 노동을 한 사람, 노약자, 병자, 어린이, 가축을 제공한 사람 등에 대하여는 작업 시간 외 초과 수당을 지급한다.

 

 캄보디아의 농업집단화정책은 식량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된 1981년부터 완화되었다.

농업생산 연대조직의 관리자들은 농가에게 비공식적으로 토지를. 할당했으며 집단농장의 규모도 확대하였다 그리고 내전과 악천후로 흉년이 들고 농민의 생활이 힘들어지자 1985년에는 일시적으로 세금도 중지되었고 1986년에는 농업집단화가 연기되었다. 1989년 봄부터는 토지의 영구사용권이 허용되었고 토지사용권도 상속되었다. 다만 매매나 소작은 금지되었다.

 

 1986년 제 5차 당대회에서 헹 쌈린 정권은 국영, 집단소유, 가계소유. 개인기업 등 4가지 소유형태를 인정함으로서 소유형태의 다양성을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수공업과 소매업 분야에서 자영업자들이 생겨났으며, 1987년부터는 사적 부문과 가계경제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991년 2월까지 국영기업중 24개가 지역당위원회의 관리를 받는 자율 경영체제로 전환되었으며 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개인 투자가에게 임대되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놈펜의 인구가 서서히 증가하고 캄푸치아 문제도 그 양상이 종전과 달라져 킬링휠드(killing field)의 4년 후 외형상으로는 정상이 되었다. 그것은 첫째, 시장과 더불어 전기와 상•하수도가 가능해지는 등 경제조건의 개선, 둘째, 헹 쌈린 정권의 외형적 안정, 셋째, 결혼제한과 가족제한이 철폐되고 집산주의의 폐지, 불교 등 종교가 허용되고, 교육의 의무교육과 개교 등으로 과거 폴 폿트 정권에 비해 헹 쌈린에 대한 국민의 보편적인 지rl 증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헹 쌈린 정권의 시장경제논리와 다원적 민주제의 부분적 도입인데, 이 사실은 시하누크의 입지를 약화시켰으며 시하누크 자신도 감지하고 있었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