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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캄푸치아 시대 (풀포트정권 1975-1978)
 

  론 놀의 망명 이후 급진적 공산정권이자 캄푸치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폴 폿트(Pol Pot)의 민주캄푸치아(The Democratic Kampuchea)정부가 들어서서 중•·소간의 패권경쟁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RV, 이하 베트남)의 팽창정책을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발전과 국방력 강화를 주장하며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적 틀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수 백년에 걸친 외세의 침탈로 캄푸치아 민족주의자들은 외세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었으며, 특히 베트남에 대하여는 인종주의적 차원에서 반베트남 의식이 강했다. 앙코르 문화의 영광을 반베트남주의와 결부시켜 베트남인을 유언(노예라는 뜻)이라고 부르는 등 폴 폿트는 매우 강한 배타적 민족주의의 경향을 보였다.

 1975년부터 3년간 캄푸치아를 둘러싸고 발생한 사건들-중소분쟁과 동남아시아로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양국의 경쟁, 태국과 베트남간의 갈등, 인간과 사회제도에 대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적용-은 인간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참한 기록이었으며, 그 결과는 인권무시, 대량학살, 물리적 ·도덕적 분열, 그리고 중소분쟁의 격화였다.

 

  1975년 4-8월 사이에 GRUNK가 시하누크와 펜 노우스를 각각 국가원수와 수상으로 추인했지만 실권은 크메르루즈의. 키우 쌈판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악명 높은 비밀위원회인 앙카(Angka, 조직)가 강력한 대중동원을 선동했다. 키우 쌈판은 국내정치에 대한 베트남, 소련, 중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비동맹외교정책을 지지하고 미국과 외교를 단절하였으며, 강력한 국가통제경제정책을 통해 산업의 국유화 및 집산주의화와 화폐경제가 철폐되었다.

 

 매우 강력한 조직인 앙카는 스스로 "봉건적,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적, 반동적, 그리고 억압적 계급들"에 대항하여 억압받는 노동자, 농민, 그리고 농노들의 지도자임을 자처하며 폴 폿트 정권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기득권층을 포함하여 반체제 인사. 그리고 무고한 인민들을 엄격히 통제하고 감시함으로서 억압적인 정치체제를 형성하였다. 이전의 프놈펜 거주자들에 대하여는 심했다. 잠재적인 반대 목소리를 침묵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이전 지배세력과 제휴했던 것으로 보여지는 모든 사람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엄격한 훈련, 완전 통제, 테러, 순수하지 못한 사회로부터의 고립 등등 가혹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1976년 1월 3일부터 효력을 갖는 헌법에 생산수단이 국가와 인민에게 속한다고 명시하고, 임기 5년의 의원(농민 200명, 노동자 50명으로 구성)으로 된 인민의회에 법안 초안권을 주었다. 시하누크는 5년 임기 국가최고회의 간부회의장으로, 키우 쌈판과 이엥 싸리(long Sary)는 부통령으로, 펜 노우스는 내각수반에 선출되었으나 동년 3월의 총선 이후에 프놈펜 방송은 시하누크의 갑작스런 사임을 발표하고 대신 키우 쌈판이 국가최고회의 간부회의장에, 그리고 폴 폿트가 수상이 되었음을 알렸다. 이 두 사람은 측근에서 지원하는 이엥 싸리와 함께 삼인방이라는 이름으로 향후 3년간 캄푸치아를 지배하였다.

 폴 폿트의 급진적 개혁정치는 공산주의 이념 외에 배타적 민족주의(반베트남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를 두 축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자본주의나 외세(특히 베트남)와 연계된 사람은 가차없이 숙청되었다. 대숙청으로 알려진 대학살이 진행되었으며(1975.4.17-1977 1.1 사이에 적어도 120만명이 처형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1980년의 통계는 200만 정도, 1986년 조사 610만으로 추정함), 이 문제는 국제문제로 비화하였고 정치적 동원을 통한 급진적 개혁은 국내적으로 비민족주의 세력의 도전을 야기시켰다.

  폴 폿트의 주요계획정책의 하나는 작은 산업시설을 전국에 분산시킨 농업국가정책으로, 농업의 자급자족과 삼모작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관개체제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다른 경제 ·사회활동은 모두 이 계획에 예속시켰으며, 전 인구를 농촌으로 보내 농업에 투입시키기 위하여, 또 도시에서 대량기아와 아사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수일 안에 모든 도시와 마을을 비우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갑작스런 강제이주의 결과 기아, 질병 등이 나타나고 강요된 노동으로 수 천명의 죽음과 이산가족을 발생시켰다. 이 이주정책은 퇴폐적인 도시의 정화를 위해, 국내안보를 위해, 간첩 제국주의자 그리고 적들을 캄푸치아에서 영구히 제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화폐경제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시장, 전화. 전보시설, 가게, 사유재산, 그리고 임금노동이 사라졌다. 가족단위는 1,000가구 기준 집산주의로 대체되었다. 소량의 음식물이 인민공사의 노동자들에게만 제공되었으며, 학교는 폐쇄되고 혁명에 불필요한 80퍼센트의 서적이 폐기되었다 사원은 쌀창고로 바뀌었다. 앙카 내의 무장한 10대들의 감시체제하에서 전국민이 동원되었으며, 이에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자는 “가장 급진적인 공산사회의 창조"를 위해 즉시 희생되었다. 그 결과 사적인, 위계적인, 개인적인, 그리고 핵가족 같은 부르조아 가치는 말살되었다

 

 농업정책 외에 또 하나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베트남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폴 폿트의 캄푸치아공산당(KCP: The Campuchean Communist Party)은 중국의 모택동 노선을 추진하며 베트남을 야만적 침략자로 규정하고 과거의 캄푸치아 실지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들어 베트남을 침공하였다. 중국의 모택동은 캄푸치아의 "혁명대의"를 위하여 "합심하여" 싸울 것을 약속했으며, 중국은 외부세계에 대한 주요 창구의 역할을 했다.

 

 1976년 9월 급진적인 국가발전계획에 비판이 일자 폴 폿트의 갑작스런 사임이 발표되었으며, 이 발표는 다음해 2월에 번복되어 폴 폿트가 재등장하여 한층 더 강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크메르루즈 내의 친소노선이 모두 숙청되고 친중국 집단만 남게 되었으나. 그후 3인방에 대한 저항과 반발은 지속되었다 반공주의자인 우파 크메르 민족주의자, 극단적인 혁명정책을 반대하는 크메르루즈의 탈당자, 그리고 캄푸치아 내 베트남인들은 쿠데타를 시도하며 저항했으며, 정국불안과 태국과 베트남을 향한 난민 문제와 이들로 인해 야기된 국경분쟁이 계속되었다.

 

  이틈을 타 베트남은 1978년 5월 콤퐁참의 크메르루즈 최고군사정치 지도자였다가 탈당한 친베트남 인사인 헹 쌈린(Heng Samrin)의 봉기를 지원하였다. 마침내 헹 쌈린은 자신의 구국민족통일전선 군대를 선봉으로 베트남군 5 개사단과 함께 12월 24일 프놈펜에 입성하여 중앙위원회를 석권하고 프놈펜에서 "해방지역"에 관한 8개항의 정책성명을 했다. 중앙위원회는 1979년 1월 1일자로 캄푸치아인민공화국(P가: The People' s Republic Campuchea)을 전언하였으며, 2훨에 베트남군의 영구 주둔을 전제로 베트남과 25년 간 상호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였다.

 

  폴 폿트는 정글 속으로, 이엥 싸리는 태국으로 피신했으며, 1976년 이래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시하누크는 프놈펜 함락 며칠 전에 북경으로 가서 헹 쌈린 정권을 비난하였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