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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공화국시대(론놀정권 1970-1975)
 

  모스크바에서 자신이 추출된 사실을 안 시하누크는 급히 북경으로 가서 론 놀의 행위가 1947년 헌법에 위배된다며 민족해방군의 조직과 캄푸치아민족 통일전선(FUNK: Front Uni National do Kampuchea)의 결성을 1970년 3월에 선언했으며, FUNK는 크메르루즈를 포함한 국내외 모든 크메르인으로 구성된 연합전선의 의장과 국가원수에 시하누크를 지명하였다. FUNK의 정치강령은 미제국주의자의 침략과 책략에 대한 저항, 부당한 박탈로부터 자유로운 국유화 경제발전, 앙코르 문화 전통의 강조, 정치적 중립외교노선 추구 등이었다. 이외에, 캄푸치아 민족연합왕실정부(GRUNK: Government Royal d'Union Nationale do Kampuchea)의 결성을 선언하고 친구 펜 노우스(Pen Nouth)를 수상으로, 과거의 정적이었던 언론인 키우 쌈판을 부수상겸 국방장관으로 지명했다. FUNK정치국 의원 13명이 GRUNK내각의 장관직을 겸임했다 FUNK-GRUNK 전략은 시하누크와 일부 각료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북경과 크메르루즈를 연결하고 캄푸치아 내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우익(친시하누크 집단)에서 좌익(공산주의자 집단)에 이르는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된 민족전선은 크메르루즈가 지배했고, 키우 심쌈판은 FUNK의 민족해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해방군, 공산베트남 그리고 베트콩 사이의 연대가 강화되었다. 크메르루즈군은 1970년에 약 3,000명이었으나 1971년 중반에는 8,500명에 달하는 세력으로 급성장 했는데, 약 70퍼센트 가량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군대였고 나머지는 크메르루즈 게릴라, 시하누크의 지지세력, 기회주의자, 병역으로 징집된 농민들, 산적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2년 중엽 토착 크메르 세력이 캄푸치아의 서쪽에서 활동하고 공산베트남-베트콩 군대는 동부 지역의 반을 점령하고 활동하였다. 시하누크의 해방군은 승리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시하누크의 통제력은 이 공산세력들에게 미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70년 3월 군부는 캄푸치아 정치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는 시하누크 때보다 더 많은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경제를 개방하고 확대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수개월이 지나며 정부의 비효율성과 부패성이 들어 났다.

 

  론 놀은 미국에게 군사원조를 요구하고, 저항군을 진압한다는 구실 아래 그해 4월 갑자기 미군과 월남군이 캄푸치아에 들어옴에 따라 베트남전이 캄푸치아로 확대된 셈이 되었다. 1970년 당시 정부군은 약35,000명이었으나 2년 후에는 20만 정도였다. 정부군은 태국 미국 베트남(월남)의 다양한 양상의 지원으로 초기에는 승리를 거듭했으나 해가 갈수록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부군의 부분적 진압작전 성공에도 불구하고 앙코르의 귀중한 문화유산은 물론 캄푸치아의 경제와 사회는 무참히 파괴되고 유린되었으며, 일부 지역은 좌파세력에게 넘어갔다. 1970-73년 사이에 미공군은 캄푸치아에 2,875회의 공습을 감행하여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투하했던 것보다 50퍼센트나 많은 24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고 한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이후 영토의80퍼센트와 전국민 740만 명 중 550만을 공산베트남, 베트콩, 크메르루즈 등 좌파에게 빼앗기는 등 크메르 공화국의 지지기반을 거의 다 상실하였으며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난민의 발생으로 프놈펜의 인구가 60만에서 200만 명으로 늘었으나 10명의 캄푸치아인 중 1명이 미국의 폭격과 베트남인들을 격퇴하기 위해 론 놀이 파견한 살인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론 놀은 국민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국회의 입법권을 박탈하고 (1971) 신헌법을 초안하여 임기 5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였으며(1972), 정권유지를 위하여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고 공공집회를 금지했으며 왕족들을 체포하였다. 결국 1973년에 미국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론 놀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권한을 대통령과 4인의 최고통치평의회에 위임하고 국회를 정회하는 한편 시하누크를 제외한 반대세력과의 평화협상을 1973년 7월에 제의하였다. 그리고 이어 12월에 론 놀은 월남군의 철수를 제외한다면 무조건 시하누크와 협상하겠다는 의사를 제시했으나, 이러한 제의는 무시되고 프놈펜에 공산주의자들이 진입하여 국내 불안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쌀과 석유의 부족으로 하루하루의 생활이 심각해졌다.

 

 1974년 6월 학생소요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교사, 노동자, 정부고용인들이 합세함으로서 정권의 유지가 어려워졌다. 수로와 육로를 통한 식량과 탄약을 위시하여 생필품 공급통로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봉쇄 당한 후(1975.1) 약 1달간 공수에 의존했다. 3월말에 소련이 GRUNK를 캄푸치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론 놀의 정부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는 사태가 있었다. 결국 1975년 4월 1일 론 놀은 자신의 출국이 정부와 반대세력이 평화적 협상을 통해 나라의 갈등을 해결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며 인도네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크메르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마침내 4월 17일 프놈펜의 정부군이 크메르루즈에 항복하였다.

 

  대량폭격, 사회혼란, 그리고 론 놀 정부의 부패는 민족주의자며 농민개혁자들로 구성된 크메르루즈를 지지하도록 만드는 역효과를 냈다고 할 수 있다. 크메르루즈는 "우리는 프놈펜 도당 반역자들과 평화에 대하여 대화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정복자로서 왔다"며 프놈펜에 입성하였다. 1970년에서 1975년까지 미국은 크메르 공화국에게 군수물자와 군사훈련을 위해 11억 8천만 달러를, 일반경제원조를 위해 5억 3 백만 달러를 제공하였다.

 

  - 상기 역사적 내용은 "동남아 미래국가 라오스, 캄보디아"의 제 7장 캄보디아의 문화와 역사(김영애글)의 내용을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