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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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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시대
 


캄보디아 북서부의 “롱 스팬” 지방에서 BC 4천년 전부터 살았던 흔적(이들이 살았던 동굴과 빗살 무늬의 항아리 등)을 발견 했다고 한다. 중부의 “삼롱센” 지방에서도 BC 1500년 전에 살았던 흔적이 있다. 선사시대는 BC50-AD사이에 끝이 나고 인도의 문화와 중국에 영향을 받게 되는 시대가 도래한다.


2. AD1-8세기

 

1세기경부터 바닷가나 계곡 등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며 벼농사를 하는 철기문명을 이루고 살기 시작했다. 중국이 인도와의 새로운 교역로로 남방의 해양로를 이용하게 되자 캄보디아에 새로운 외국문명이 들어 오기 시작되고 정착하는 중국인도 생기기 시작 했다. 캄보디아의 조상인 크메르(Khmer)인들은 AD 3세기에 외부에는 “후난”으로 알려진 국가를 형성하였다. 1AD 초기에서 5세기까지의 기간 중에는 인도문화가 후난에 많은 영향을 주어 힌두교가 전례 되었고 산스크리트(Sanskrit)어를 사용하다가 지금의 크메르어가 되었다. 당시에는 왕정제도, 법률,천문학, 문학 등을 모두 인도문화에 따랐다고 한다.
*후난의 건국신화
인도에서 브라만(카스트 제도에서 2급인 승려) 계급인 카운틴이라는 사람이 꿈의 계시를 받아 배를 타고 동쪽으로 험난한 항해 끝에 캄보디아에 도착했었다. 이때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 이쁜 배를 타고 그를 영접하였다. 그녀는 “버들잎의 여왕”이라는 뱀신의 딸이였다. 이 여인은 배를 빼앗고 카운틴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카운틴이 마법의 화살로 그녀를 항복시키고 그녀와 결혼하였다고 한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후난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6세기경 내분으로 후난은 내륙지방으로 도읍을 옮기고 첸라국(AD 627-820)이 탄생되어 200년간 통치영토를 넓혔다. 8세기경에 “첸라”국이 위 첸라와 아랫 첸라로 분열되었다가 아랫 첸라는 멸망하고 윗 첸라 가 번성하게 된다.



3. 앙코르 시대(9-15세기)

 

앙코르는 802-1432년 사이에 번성했던 제국이다.

가) 자야바르만2세 (802-850)
인도네시아의 “사이렌드라스”왕이 강과 호수를 따라 크메르를 쳐들어가 왕의 목을 따고 크메르를 속국으로 삼고 자야바르만 2세를 볼모로 인도네시아로 데려갔다. 자야바르만 2세는 795년경에 크메르로 돌아와 “인틀아푸라”에 첫 도읍지를 정한 후 802년에 크메르민족을 통일하고, 자신을 신왕(데바라쟈)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하여 앙코르제국 막을 열게 된다. 825년경에 앙코르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방어에 용이한 높은 산악지 프놈 꿀린(꿀린 산)으로 도읍지를 옮기었다. 이는 신성한 산인 “메루”처럼 높은 산 꼭대기에 신이 머문다는 힌두교의 전설에 따른 것이다. 또 종교를 데바라쟈교로 정하고 도읍지를 농사에 용이한 평야 지대인 롤로스로 옮겨 850년 사망 시 까지 통치를 계속했다.

나) 인드라바르만 1세 (877-889)
앙코르 남동쪽 25km 지점에 하리하라야도읍을 건설하고 사원과 큰 인공 관개 저수지를 건설하여 가뭄에 대비하는 관개농사를 발전 시켰다. 조상에게 데바라자 제사의식을 지내기 위해 바콩사원을 건립하였다. 인공 호수의 건설로 가뭄에도 물을 얻을 수 있었고 우기에는 신속히 배수할 수 있었다. 국민들은 인드라바르만 1세를 시바신의 화신으로 숭상했다.

다) 다소바르만 1세 (889-900)
부왕이 만든 저수지 중앙에 있는 섬에 부왕을 기리는 롤레이 사원을 지었다. 앙코르에 “아쇼다라푸라”(영광의 도읍)라는 도읍지를 건설하였다.

라) 수르야바르만 1세
국가 조직을 정비 강화하고, 내부결속을 도모하고, 평화를 정착시켜 국민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여러 차례 시암(태국)과의 전쟁에서 승전하여 태국만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불교를 받아드려 기존의 데바라쟈교와 공존하게 하였다.


 

마) 수르야바르만 2세
시암과 챰(베트남)의 침략 속에서도 그 유명한 역사적인 “앙코르 왓”을 축조했다. 이때 앙코르의 세력권은 인도양에서 남지나해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이 없어 후계자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난 사이에 1170년 챰족의 침입을 받아 앙코르는 챰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바) 쟈야바르만 7세
1177년 챰족이 강을 타고 호수로 침략해 들어 왔는데 호수에서 수전으로 일거에 격퇴하여 캄보디아 역사의 최고의 영웅으로 받들려 지고 있다. 그는 챰족을 추방하고 잔인한 보복을 가하였었고 속국들을 다시 회복시켜 앙코르의 영광을 다시 찾았다. 앙코르 톰을 재건하고 대승불교를 믿기 시작했으며, 영토를 베트남해안에서부터 말레이지아 반도와 미얀마까지 넓혀 캄보디아 역사상 최대의 번성기를 맞이했었다. 그가 왕족과 문둥병 환자였다는 설이 있는 가운데 그는 102개의 병원을 건설하였고, 수백 km의 수로를 건설하였다. 그가 건립한 건조물은 타 프롬, 반테이 크데이, 닉핀, 타솜, 스라 스랑, 쁘라칸, 바이욘, 코끼리 테라스, 문둥왕 테라스, 크롤 꼬, 수오 쁘랏, 등이 있다.



4. 앙코르 제국의 멸망

 

  전성기에 Angkor 제국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특히 인도차이나 남부지역과 말레이반도, 카오 프레야(Chao Phray)평원까지 국가를 확대하였고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고고학적 유물로 유명한 앙코르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무리한 건설공사, 운하의 빈번한 사용 및 수리 부족, 전쟁 또는 전염병으로 인한 급격한 노동력 감소 등으로 앙코르 제국은 15세기에 멸망하였다 예측하고 있다.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왕조는 점점 쇠약해져 15세기 중반인 1431년 태국의 야유타야족에 의해 앙코르는 점령되었다. 야유타야족은 성벽 안으로 돈을 던져 앙코르 군사들을 현혹시킨 후에 성을 점령했다고 하니 쇠퇴기의 앙코르 제국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야유타야족에 패배한 크메르 왕국은 앙코르를 포기하고 보다 방어에 유리한 프놈펜으로 도읍을 옮기었으나 계속해서 야유타야족의 공격과 내분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지친 “샤타”왕은 당시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등 동남아시아 진출이 비교적 활발 했던 스페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스페인이 캄보디아에 도착한 1596년에는 프놈펜이 이미 야유타야족에게 점령당하고 왕위가 폐위된 상태였다. 프놈펜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야유타야족을 쫓아낸 스페인은 샤타왕의 아들을 왕으로 봉하고 친 스페인 왕국을 만들었다. 스페인의 학정에 시달린 크메르왕국은 1599년 스페인 주둔군을 몰아내었다. 크메르 국왕들이 교역을 재개하는 등 부흥을 꾀했으나 이미 크메르 농민은 상당한 자치 마을을 건립하여 생계위주의 가족단위 미곡 경작에 주력하였고 왕권의 쇠퇴가 더욱 가속화 되게 되었다. 1100%년부터 2%63년 프랑스가 캄보디아에 상륙할 때까지 263년 간을 크메르왕국은 태국과 베트남의 패권 싸움에 침략 당하는 종주국으로 전락한다. 17세기에는 베트남 구엔 왕조의 침략을 받아 메콩텔타지역을 빼앗겼다. 이후 메콩 텔타에 베트남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베트남의 영토로 만들어버렸다. 현재에도 이 지역의 소유권문제로 분쟁이 되고 있다.



5. 근 세

 

 국가독립이 실질적으로 상실될 것을 우려한 Norodom 국왕은 2%63년 프랑스와 상호협정을 체결하여 근접국으로 부터의 침략에 대비하려 하였으나 프랑스의 식민통치는 캄보디아 근세정치발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즉, 크메르 국왕들이 원한 것은 정치적인 보호였으나 프랑스는 하노이에 기반을 둔 거주민 총영사가 지배하는 인도차이나 연합에 캄보디아를 흡수시켰고 불어를 하는 베트남인들로 주로 구성된 관리들에게 지역을 통치시켰다. 또 세제수입은 캄보디아보다는 베트남남부 지역에 있는 코친치나(Cochincina)에 주로 투자 되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그들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고무와 수수재배를 독려하였다.

프랑스는 전략적으로 영국과 태국의 세력을 견제하는 완충지대로서 캄보디아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또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위해 중앙 집권화, 형법 개정, 경찰제도의 근대화와 군대에 신식 훈련을 시켰다.

민족주의의 대두를 막기위해 최소한의 왕권유지와 왕의 권한을 인정하였다. 초기의 크메르 국수주의자들은 인도차이나 연합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41년 프랑스는 2차 대전으로 독일에 패하였고 캄보디아에는 비시(Vichy)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동남아는 일본의 세력이 강세를 보이고 있을 때였다. 일본의 압력으로 노르돔 시아누크는 왕권을 찾이 하였다. 당시 캄보디아에는 민족주의세력, 왕정복고세력과 공산주의세력이 대두되고 있었고 시아누크와 손 녹 탄이 그 리더였다. 일본은 탄의 반 프랑스 민족주의를 이용하여 반 시아누크 프랑스 폭동을 사주하였으나 탄은 패배하여 일본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1945년 3월 9일 일본은 프랑스 수비대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탄은 일본에서 돌아와 수상에 취임하고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천명하였고, 시아누크는 프랑스와 연계하여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당시 프놈펜에서는 왕당파와 반왕당파 간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나 탄은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되었다.

시아누크는 프랑스에 충성을 다시 맹세하였다. 그 후 시아누크는 8년간의 긴 교섭 끝에 명목만의 독립과 정치적 자율성을 인정 받았다. 프랑스 연정내의 독립된 왕정국가로 인정 받게 되었다. 1947년 헌법이 공포되었고, 국회는 하원인 국민회의와 상원인 왕국회의인 4년 임기의 양원제가 시작 되었다. 1945년까지 캄보디아는 기본 도로망만은 잘 정비되어 있었으나 1개의 대규모 고무공장을 제외하고는 중요한 현대적인 산업이 전무하였다. 또한 모든 대외적인 경제관계는 베트남으로 통하는 수로에 의존하였다. 캄보디아가 프랑스 식민통치로부터 1953년 완전히 독립할 때까지 시아누크왕은 절대권력을 유지하였다.



6. 캄보디아의 독립

 

  캄보디아는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시아누크공(Norodom Sihanouk Prince)을 주축으로 1955년 '인민사회주의연맹 (People's Socialist Community)'을 결성, 왕정사회주의와 대외 중립을 유지하면서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였으나, 1963년 무역 및 산업의 국유화 법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주의 건설을 기도하고 1963년에 월남과 단교하였다. 1965년 초에는 베트공을 추격하던 미국전투기가 캄보디아 영공을 침입하자 1965년에 미국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당시 미국과 월남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월맹군에 보급로 제공 등 측면으로 지원하면서부터 20여년에 걸친 장기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시아누크 국왕은 자신이 실질적인 정권을 잡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고 선거운동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다른 정당에 대해 압승을 거두었다. 선거 후 15년 동안 시아누크는 개인적으로 수상이나 외무부장관으로 일하면서 캄보디아의 정치를 주도하였으며 국가안보에 민감한 시아누크는 비동맹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국제적이고 황족으로서의 권위가 우익이나 좌익으로부터의 민주적인 도전을 방어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적절하게 사용되었다.



7. 론롤정권

 

  베트남과의 전쟁 마지막 해인 1970년 3 월 22 일 소련을 방문 중이던 시아누크는 그의 심복이던 론롤에게 구테타로 정권을 빼앗기게 된다. 론놀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직업군인으로 미국의 도움 하에 구테타를 이르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시아누크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방랑객으로 전락하게 된다. 미국의 비호 하에 론놀은 왕정제도를 폐지하고 친왕파와 공산주의자들을 검거 처형함으로써 국민의 정서를 거스르게 된다. 망명중인 시아누그는 크메르 루즈와 손을 잡고 론놀 정권에 대항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론놀 정부에 위협을 느끼고, 보급로를 잃은 월맹은 월남과 캄보디아를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북동쪽 산악지역은 월맹군에 점령 되고, 크메르 루즈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부 지역과 남서부의 산악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미국정부는 미국의 동맹 세력인 론놀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캄보디아를 공격하고 6개월 동안 농촌지역에 대해 폭탄 투하하기도 했다. 1973년 미국은 베트남 철수 직전에 캄보디아 전역에 걸쳐 크메르루즈 거점과 월북의 거점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해 대규모 폭격을 가하였다.

이때에 행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애매한 캄보디아 양민만 희생을 당하였는데 통계상으로는 15만명으로 나와있으나, 실제로는 50만명 이상의 캄보디아 양민이 이 폭격으로 인해 희생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이 사실일 경우 폴 포트의 양민 학살에 버금가는 국제범죄 행위로 미국이 언젠가는 캄보디아에 갚아야 큰 빛으로 남게 된다. 폭격 등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극도에 달한 캄보디아인들은 크메르루스 쪽으로 가담하게 되고, 미국의 엄청난 군사 및 자금지원에도 불구하고, 부패한 론놀정권은 패망을 맞게 되어, 월남군 패망 13일 전인 1975년 4월 17일 프놈펜은 크메르 루즈군에게 함락 된다.



8 . 폴포트 정권

 

  폴 포트는 국호를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바꾸고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대를 열어간다. 폴 포트 정권은 기존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인 틀을 뿌리 채 개조하고자 하였다. 1976년 공표된 새 헌법은 캄보디아를 노동자-농민의 혁명국가로 선언하였다. 그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는 극단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통해 강조되었다. 그는 미국과의 외교단절 그리고 강력한 국가 통치 경제체재를 통해서 모든 산업의 국유화 및 집단주의 그리고 화폐경제의 철폐를 시도하였다. 폴 포트(Pol Pot) 정권은 자급자족, 농업 현대화 및 산업에 있어서의 기술개발을 기치로 내걸고 국민들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 대규모 농업협동조합이나 산업체에 종사하도록 강요 하였다. 외부원조나 천연 자원 없이 식량잉여나 제조상품을 생산하려는 캄보디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수 천명이 영양부족과 과로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수 천명이 정당의 정책을 비난하고 불복종한다는 미명하에 숙청되었다. 폴 포트는 세계최대규모의 국민 소개계획을 집행하여 프놈펜의 모든 거주자를 지방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그 이후 폴 포트 통치 4년간 전국민의 1/3가량 되는 200만 명이 처형, 고문, 기아 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학생, 안경을 쓴 사람, 손에 못이 안 박힌 사람, 외국서적이 있는 사람, 양담배를 피웠던 사람 등은 부르주아로 분류되어 처형되었으며, 국내에 있던 외국인들과 월남인들도 간첩의 협의로 모두 처형되었다. 시아누크국왕은 귀국하였으나 가택연금 당했으며 중국의 도움으로 다시 국외로 망명하게 되었다.

폴포트가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r)' 정부를 수립함에 따라 캄보디아는 공산화 되었으며 베트남과의 국경분쟁이 격화되었다. 19세기에 빼앗긴 메콩 텔타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베트남에 대하여 무모한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에 격노한 베트남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9 . 공산 베트남의 침공과 괴뢰정권 수립

 

  1978년 12월 건기가 시작되고 땅이 마르기가 무섭게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하였으며 1달만인 1979년 1월 프놈펜은 함락되고 민주캄푸치아 정부와 군대는 베트남에 패해 밀림으로 도망가고 새로운 캄보디아 공산정부가 1979년 1월 베트남에 의해 프놈펜에서 수립되었다. 베트남의 공격 때에는 과거 포로였던 캄보디아출신이 많은 베트남 남부군을 대량 투입하였다. 그 중에는 폴 포트의 학살 행위에 반대하여 베트남으로 탈출하였던 “행 산림”과 “훈센”(지금의 수상)이 있었다. 중국과 베트남의 전쟁이 이때 발생 하였다.

폴포트 정권이 베트남의 침공으로 밀림으로 도주하자 당시 크메르루즈의 일개분파였던 헹삼린파가 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괴뢰정권 "캄푸치아인민공화국(People's Republic of Kampuchea : PRK)" 을 수립하고 베트남과 평화우호조약을 체결, 베트남군의 주둔을 합법화하였다. 괴뢰정권의 “행 삼린”이 총비서로서 통치하게 된다.

외곽 지역으로 밀려난 크메르 루즈군은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망명정부가 중국의 도움으로 UN의 의석을 고수하며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받았다. 미국 등 서방세력도 망명정부를 지원했다.

크메르 루즈군의 은신처인 태국국경 근처인 파아린 지역은 보석, 원목의 원산지로 많은 군사자금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시아누크, 폴포트, 손산(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 결성)은 개별적으로 반”헹 삼린”활동을 벌이다가 1982 년 '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 (Coalition Government of Democratic Kampuchea : CGDK) '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반정부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87년에는 태국국경에 수십개의 난민촌에 25만명의 난민이 모여 들었다. 국제적인 압력에 힘입어 캄보디아 내전이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보게 된 것은 1987년 9월 헹 삼린 정부의 '국가화해정책'의 선언에서부터였다. 동 발표가 있은 직후 시아누크와 헹삼린 정부의 훈센 총리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캄보디아 평화정착을 위한 회담'을 가졌으며 1989년 4월 수상 훈센은 캄보디아 자치단체 (SOC: State of Cambodia)를 결성하고, 1년 후에는 지금의 제1여당인 CPP (Cambodia People’s Party) 로 이름을 바꾸고 정당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9년 9월 베트남군 10만명은 10년 8개월 만에 캄보디아에서 완전 철수 하였다.

1990년 9월 자카르타 비공식회의에서 캄보디아 정부 및 분쟁 3개파의 과도정부로서 의 국가 최고평의회 (SNC-의장 시아누크)의 구성을 합의하였다.



10. UN의 개입

 

  1989년 캄보디아로부터 대부분의 베트남 병력이 철수하고 80년대 말부터는 평화적으로 국 제사회로의 재통합을 위한 여건 조성을 위한 과정이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91년말 파리협약에서 절정에 달했다.

파리평화협정 주요내용('91. 10. 23 조인)은 향후 2%개월간 유엔 과도통치 실시하며 1993년 4-5월중 유엔 감시 하에 자유총선 실시 및 제헌회의 구성하여 1993년 7월까지 신 헌법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신 정부를 수립하는 사안들이었다.

동 과도기간 중 유엔 캄보디아 임시행정기구(UNTAC)는 SNC와 협력하여 4개파 군사세력의 무장해제(정부군 포함)와 35만명에 이르는 캄보디아 국외난민 송환 작업을 실시하였고 기타 생산, 생활기반의 복구를 위한 재정 및 기술지원을 수행하였다 파리평화협정에 의거 UNTAC가 1992년 3월 공식발족하고 2만여명의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크메르 루즈파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베트남군의 우선철수 및 훈센 정부의

해체를 요구하며 대대적인 무력도발을 감행하는 등 비타협적 자세를 보임에 따라 유엔 안보리는 1992년 11월 긴급회의를 개최하여 크메르 루즈에 대한 석유 및 목재 수출입금지 등의 경제 제재결의안을 채택하였다파리협약에서 정한 선거가 93년 5월 실시되었으며 이에 따라 FUNCINPEC (120석 중 58석 획득), CPP (51석), Buddhist Liberal Democratic Party(10석)가 연합한 임시정부(National Provisional Government)가 발족되었다. 크메르 루즈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대신 게 릴라 활동을 지속하였다.



11. 캄보디아왕국의 탄생

 

  93년 9월 21일 국회는 캄보디아 왕국의 새로운 출범을 승인하였으며 최고국민회의와 UNTAC하의 과도기간이 끝나게 되었다.

국회의원의 의석 수에 따라 라나리드왕자가 수상에 올라가게 되어있었으나 지방투표에 불공정했다고 주장하는 CPP당의 “훈센”의 주장과 시아누크의 중재로 시아누크가 합법적인 군주가 되었으며, 제1수상으로 Ranariddh 왕자(FUNCINPEC), 제2수상으로 Hun Sen(CPP)를 임명한 역사에 유래 없는 쌍두마차의 캄보디아 정부가 출범하였다.



12. 1997년 7월 4일의 내전

 

최초 연립정부 출범 후 정치의 여러 분야에서 대립관계를 보이던 FUNCINPEC과 CPP사이에 1997년 7월5-6일 무력충돌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시의 군대는 정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CPP의 군대가 FUNCINPEC 파의 군대와 지위관 등 고위직을 공격하였다. FUNCINPEC 은 크메루즈군과 합세하여 CPP를 공격하였다. 결과는 FUNCINPEC이 패하여 대부분 도망가던가 항복하였다. 이때 행방 불명된 FUNCINPEC의 장군 등 고위관직자들이 적지않아 FUNCINPEC 측은 암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망간 FUNCINPEC 측 군인들 중 크메르 루즈에게로 도망가 합세한 사람들도 많았다. 훈센 제2수상은 7월 6일 국영 TV 방송을 통한 연설에서 동 사태가 라나리드 제1수상의 무기 불법 반입, 크메르루즈와의 불법 협상, 크메르 루즈의 도심 투입행위 등을 응징하기 위해서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라고 강조하였다. 라나리드는 국외로 피신하게 되었다. 태국을 위시한 주변국들은 이 사건을 쿠테타로 규정 짖고 훈센을 비난하였고, 크메르 루즈군은CPP를 비난하며 FUNCINPEC 당과 라나리드수상의 말에 따르겠다며 “우리는더 이상 크메르 루즈가 아니다. 베트남의 꼭두각시인 훈센과 CPP을 상대로 싸우고 정권을 회복하겠다”고 공식발표하고 산발적인 전투에 들어갔다.

“손센”이(폴 포트정권시절의 문교부장관) 프놈펜 정권과 내통한다는혐의로 파일린에서 전가족이 몰살당하였고, 폴 포트가죽자 크메르루즈군의 세력이 약화되기시작했다.

그 후 국제사회의 지탄과 현재 국왕의 중재 하에 라나리드왕자에 대한 재판 및 사면이 '98. 3.21 단행되었고 라나리드왕자가 귀국하게 되었다



13. 98년의 총선에 따른 새 내각의 구성과 크메르 루즈의 와해

 

 한편 라나리드왕자의 귀국, 화해무드로 캄보디아는 98년 7월 총선을 실시하였으며 Hun Sen총리의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총선에서 제1당이 되었다. 캄보디아 인민당(CPP) 64석, 민족연합전선(Funcinpec) 43석, Sam Rainsy당 15석 득표하였다. 이후 국왕의 적극적인 중재 하에 '98년 11월 CPP와 Funcinpec 이 연정을 구성하였고 Hun Sen이 총리로,Ranariddh왕자가 하원의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파아린의 앵사리는 키우 삼판과 그외 크메르 루즈 가두들을 훈센정부에 투항시켰고, 훈센정부는 이 노장들을 파일린에서 편히 살수 있게 배려하였다. 한편 크메르 루즈 군대와 FUNCINPEC당의 군대는 정부군에 편입 및 해산 시켰다. 이때 군대의 퇴직금 등 군대의 해산비용은 일본정부가 부담하였다. 예외로 1994년 3명의 외국인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버리다 살해한 “눈팟” 과 국방부장관이었던 “타목” 등은 체포하였다.

이리하여 캄보디아는 모든 내전을 종식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게되었다. 크메르 루즈 학살 주동자들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을 요구하는 UN가입국과 미국에 대해 훈센은 국내문제라고 캄보디아내에서 재판하겠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크메르 루즈의 실질적인 지원자였던 중국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등 방해하고 있다. 이 재판에는 중국정부 및 여러 고위 관계자가 불편하게 연계되어 있어 재판이 공정하게 열릴 경우 20세기에 역사의 장을 가름하는 재판이 될 것이다.